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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을 넘어 삶으로”- «이제 모든 것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


연구실의 친구인 ‘노들장애인야학’과 꾸준히 함께 공부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장애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몇 년 전, 장애 운동계의 가장 큰 이슈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었다. ‘버스를 타자’로 압축될 수 있는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는 여전히 열악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상당한 진전을 낳았다. 예전보다 노란색 장애인 콜 택시가 자주 눈에 띄고, 저상버스도 많이 도입되었다. 광화문 사거리에 놓인 횡단보도도 큰 성과다. 서울의 중심이라고 할 그 곳을, 이제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모두 다닐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최근 장애인 투쟁의 큰 주제는 ‘탈시설’이다. 시설에서 나와 장애인들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은 사람과 살겠다는 것. 이동권 투쟁에 비해 탈시설 투쟁은 느리고 힘들게 진행된다. 우선, 이동권 문제보다도 탈시설 자체가 더 큰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어울려 생활하려면 많은 인프라가, 정확히 말해서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지 돈 문제만은 아니다. 장애인의 탈시설 지역생활을 가로막는 것은 아주 옹골찬 편견이다. 장애인은 어쩔 수 없이 복지 시설에서 생활할 수 밖에 없고, 그게 너무 갑갑하다면 가끔씩 외출하는 것은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우리 동네에서 산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장애를 가진 사람은 노동할 수 없으며, 그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모든 돈을 국가나 공동체가 대 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예컨대 악덕 시설에서 생활하는 어느 장애인의 생명이 위태롭다면, 그가 생존할 수 있도록 국가나 사회가 돕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가 생존의 권리를 넘어 자아를 실현할 권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요구한다면? 바로 이때 노동윤리이자 노동복지workfare 개념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따라서 노동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기 힘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이들을 왜 사회가 ‘삶의 풍요를 누리는 정도로까지’ 돌봐 주어야 하냐는 불만들이 터져나온다. 그런데 -장애에 따라 다 다르긴 하지만- 장애인처럼 ‘노동할 수 없거나 애초에 임금노동이 불가능하다면, 그때 사람의 삶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겨난다. 그는 끊임없이 사회의 동정과 시혜를 받아가며, 최소한으로 생존해야 하는 걸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윤리는 쉽게 깨지지 않는 아성이다. 우선, 서구 유럽의 정신적 한 기둥인 기독교 전통이 노동윤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신을 만나고, 노동의 성과를 통해 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맑스주의에서도 노동윤리 자체는 거부되지 않았다. 맑스주의 유토피아의 두가지 지평에서, 노동은 비록 그 강조의 의 지점이 다를지언정 양쪽 모두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레닌’으로 상징되는 고전적 맑스주의 유토피아에서 노동은 다가올 코뮤니즘, 언젠가 도약할 그 코뮤니즘을 위한 전 단계로서 강조된다. 이른바 레닌의 2단계 유토피아론. ‘공장 훈육의 전 사회화’를 목표로 하는 1단계와 1단계를 기초로 도래할 진정한 코뮤니즘. 이때 1단계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기간이다. 노동자들의 자기 희생이나 인내가 강조되고, 꾸준한 훈련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 미래의 발전을 위한 노동계급의 희생, 그리고 근면성과 기술향상에 대한 찬사는 레닌식 맑스주의 유토피아와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겹치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이 모델이 보여주는 한계는 명확하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강화해야 하는 모순 말이다. 결과적으로 도래할 유토피아에서도 여전히 자본의 구조와 가치들이 잔존하게 된다.

반면 에리히 프롬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ㆍ휴머니즘적 유토피아론에서는 노동 ‘소외’를 부각시킨다. 문제는 생산과정에서 개인들이 끊임없이 소외되는 구조에 있다. 따라서 노동 소외로부터 창조적 개인들을 구출해야 한다. 노동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노동은 자기 창조의 표현이자 수단이 된다.특히 프롬은 소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추상노동 보다 구체적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노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거칠게 말해 레닌이 더 많은 노동 끝에 유토피아가 온다고 주장했다면, 에리히 프롬은 더 나은 노동을 통해 유토피아가 온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즉, 이론전개의 논리는 다르지만 기존의 맑스주의 유토피아 이론에서는 노동이 인간의 근본적 가치라는 생산가치 자체는 항상 긍정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을 인간의 근본가치 중의 하나로 설정하면, 서두에 언급한 장애인처럼 노동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 노동할 수 있음을 코뮤니즘의 필수조건처럼, 따라서 코뮤니즘을 노동이라는 하나의 단계를 통과해서만 실현되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노동 윤리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노동거부’는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 왔다. 또한 자율주의자들은 앞서 살펴본 맑스주의 유토피아 이론에 대한 비판에 기반하여, 노동거부를 단순히 소극적이거나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는 정치의 요구와 지평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자율주의자들에게 맑스의 「요강」(1857)은 중요한 텍스트이다. 자율주의는 「요강」에 기반해 고전적 맑스주의 해석이 갖는 변증법적 성격에 맞서, 맑스가 갖는 적대와 분리의 성격과 노동자들의 주체적 행위를 강조한다. 또한 고전주의 유토피아 이론에서 레닌이, 낭만주의ㆍ휴머니즘적 유토피아 이론가로는 에리히 프롬이 대표적이라면, 노동거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맑스의 사위로도 유명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저자 폴 라파르크가 중요하다. 라파르크는 노동자가 노동할 권리를 스스로 주장하는 것은 노동을 교리로 삼으라는 꾐에 스스로 빠진 것으로, 그 대가는 모질고 끔찍한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처럼 노동거부는 노동할 권리를 넘어서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자유는 노동일의 단축”이라고 말하는 맑스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다.

과연 노동거부가 적극적인 정치적 실천일 수 있을까? 「이제 모든 것을 다시 발명해야 한다」의 공저자 케이시 웍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현대 사회 노동은 공장 노동으로 대표되는 과거와 달리 노동자와 노동이 선명하게 분리되지 않으며, 노동자의 특성이 노동의 결과물에 강하게 반영된다. 따라서 예전처럼 경영자가 노동자를 노동 과정의 단계별로 감시하고 포섭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거부는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노동거부는 단지 노동을 거부하는 부정의 단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노동거부는 자본으로부터 탈주의 운동이자 새로운 삶을 향한 발명의 과정까지를 나타낸다. 새로운 삶을 향한 발명이란 맑스와 엥겔스가 밝힌 것처럼, 도달해야 할 상태나 참조해야할 이상이 아닌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실재적 운동”으로서의 코뮤니즘을 실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거부를 활동과 창조성의 거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노동거부는 단순히 노동을 폐기하는게 아니라 노동을 최고의 소명이자 도덕적 의무로 놓는 노동 이데올로기, 노동을 사회적 삶의 필수적 중심으로 놓으면서 노동을 통해서만 권리와 시민권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것, 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명령이 필수적이고 가치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포함한다. 직접적 목표는 노동시간과 노동의 사회적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것, 자본주의적 명령을 협력의 새로운 형태들로 대체하는 것으로 표현된다.”_161p

자율주의가 말하는 노동거부는 노들야학 학생들, 더 나아가 많은 장애인들이 좀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데 하나의 무기가 되어줄까? 현실의 묵직한 문제에 비해 대답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거부는 임금노동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노동윤리를 반박하는 중요한 논리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미 한국사회에서도 조금씩 노동거부의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정규직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들, 정규직의 삶을 거부하고 메이저들이 보기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타족이나 백수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등장. 이들은 임금이나 경쟁 그리고 노동이 자신의 삶을 점령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프리타족이나 백수 뿐 아니라 노동할 수 없는 장애인 역시 삶이 노동의 대가로 교환되어서는 안된다. “삶이 더 이상 노동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 노동거부는 각자의 생존을 각자의 노동 능력에 맡기는게 아니라, 공동체가 생산해내는 공통적인 것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사회로의 이행을 촉구한다. 노동할 권리에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그리고 노동을 넘어서 새로운 협력과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원문 링크 : http://suyunomo.net/?p=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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