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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권력 쟁탈 없이 세계를 변혁하라!! -


국가권력 장악과 그 이후의 국가 파괴라는 레닌의 2단계 이행론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역사적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많은 좌파적 담론들은 이 문제에 대한 발본적 답변을 내리길 회피해 왔다.
맑스주의의 담론들이 복수적 색체를 띄며 등장한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의 대한 비판은 변혁적 좌파 내부의 성역을 이루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러한 경향은 탈근대주의에 대한 경계를 위시하여 반자본 이론의 사유 틀에 대한 제한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담론적 경향에서 맑스주의에 대해 가해지는 여러 비판들은 이제 회피한다고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문제는 회피를 넘어 어떻게 발본적인 관점에서 논쟁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러웨이의 역작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는 이러한 질문에 맞서 그 어떠한 책들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다.
홀러웨이에게 있어, 사회적 적대를 이루는 것은 삶을 살아가려는 인간의 실존적 힘 - 즉, 지향력(power-to) -과 그것에 척도를 부과하고 물화하려는 힘 - 지배력(power-over) -간의 격렬한 투쟁의 관계로 정의된다. 지향력은 이미 항상 삶 속에 있으며, 지배력의 동일자적 폭력을 넘어서려는 모든 행위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다양한 행위들을 동일한 추상적 노동시간으로 환원하려 한다. 특이성들이 만들어내고 지향해가는 삶의 시간은 자본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노동시간에 의해 착취되고 물신화 된다. 그러나, 지향력은 지배력에 완전히 흡수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노동시간이 삶의 생산적이고 구성적인 시간에 의존해야 하듯, 지배력은 오직 지향력의 힘을 변형시킴으로써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결코 나름의 완결성을 가진 어떤 것이 아니다. 홀러웨이의 관점에 있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물신주의 비판을 타자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 이상으로 진전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폭력성의 완결된 어떤 것인양 받아들임으로써, 비판적 실천을 위한 관점을 발본적으로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홀러웨이는, 비판을 위한 인식의 관점을 전환시킨다. 물신과 물신주의의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신화의 부단한 과정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신화의 과정이라는 말을 할 때, 이 과정이라는 말에는, 물신(주의)가 완결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그리고 나아가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하나의 완결된 물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향력이 지배력에게 완전히 봉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보았듯, 지배력이 근본적으로 지향력에 기생해 있는 힘인 한,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여기가 홀러웨이가 “물신주의 비판”의 문제설정을, “과정으로서의 물신화 비판”이라는 관점으로 전위시키는 지점이다.
비판의 대상이 “물신주의”에서 “과정으로서의 물신화”로 변함에 따라, 비판의 초점은 완결된 폭력성의 두려움을 알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유약함을 보고, 우리의 저항적 힘과 ‘존엄’의 지향성을 파악하는 데로 정향된다. 인간은 “존엄”의 이름으로 물신화의 폭력성과 대면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홀러웨이의 이러한 관점은 국가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나타난다. 좌파 이론의 일반적 경향은 국가가 존재한다고 강하게 믿는 데에 있다. ‘국가의 권력이 부르주아의 손아귀에 있기에 우리가 저 것을 빼앗으면 삶의 해방이 올 것이다!’라는 관념. 이 관념이 인류의 역사에 부른 폭력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이제 사회주의 국가체제에 대한 분석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홀러웨이는 이 문제설정 또한 넘어선다.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화를 위한 과정’으로서만 나타날 뿐인 것이다.(이러한 관점은 푸꼬의 관점과 연결된다.)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전략적이고 유동적인 접합/배치를 통해 생산되고 허물어지는 것이라 할 때, ‘국가권력’은 더 이상 소유/쟁취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게 된다. 혁명은 국가장악과 그 이후의 그것의 파괴라는 시간적 계열에 의해 사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실천은 국가라는 권력의 허상자체를 발본적이고 직접적으로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기에, 이행은 국가장악과 해체라는 모순된 두 개의 변증법적 과정을 택하지 않는다. 비판적 주체는 권력과 지배 속에 있지만, 항상 그것에 저항하며, 또한 이미 그것을 넘어서 있는 우리들의 꼬뮨주의적 이름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비판과 혁명의 문제는 국가와 권력이라는 정태화된 틀을 넘어선다. 비판과 혁명은 “존엄”을 위한 실존적 저항의 움직임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홀러웨이가 여타의 맑스주의 이론을 넘어서 - 그리고 맑스조차 넘어서 - 혁명적 이론의 혁신을 이루어냈다면, 비판적 주체들의 존엄을 향한 이 저항적 힘을 보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책은, 애초에 한글로 씌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매끄럽게 읽힌다. 번역문이라는 선입견을 초월하는 시적 표현들과 호흡은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묘미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책(한글 번역본)에도 결점은 있다. 여기서 옥의 티를 잡아낸다면, 제목의 번역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원제로서의 “권력 쟁취 없이 세계를 변혁하라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와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변형된 제목은 서로 의미하는 바가 대단히 다른 것들이다. 전자는 후자의 정치적 소극성을 이미 넘어서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홀러웨이의 비판의 경향은 후자와 같은 질문형의 반작용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서서 움직이는 지향력의 힘(그리고 그 창조적 선언)만이 지배력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형성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다”라는 답변 이후에 대안을 기다려야 하는 후자의 단계론적 비판의 방식이, 질문과 대안을 구분하지 않는 지향력의 직접적 비판의 경향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더불어, 이 책의 주제가 '국가권력'에 맞추어져 있다기보다 '변혁하라'라는 구호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두 제목간에 나타나는 차이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홀러웨이가 -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비판을 통해 - "물신주의 비판"이라는 고전적 테제를 “과정으로서의 물신화 비판”이라는 혁신적 관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둘간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이다. 이제, 답을 위해 묻기를 하는 방식의 단계론적 비판 자체에 의문을 던져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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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童 (2003-11-10 02:08:08) ⓧ


알라딘에 올리려고 썼는데, 글이 길어서 알라딘에는 부분적으로 삭제를 해서 올렸습니다. 위의 글은 원문 전체입니다. 알라딘에 올리고나서 다시 수정을 보았기에 삭제된 부분 외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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