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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밖의 길} 해설 - 조정환

조회 수 4281 추천 수 0 2004.05.25 16:34:22
해설



바람의 시간, 존재의 노래

조정환




1

   백무산 시인이 대지와의 합일을 통해 궁지에 처한 혁명을  움직이려 해 왔다는 것, 이것을 둘러싼 무수한 오해는 이제 조금씩 걷히는 듯하다. 그는 망치의 노래를, ‘두드려라 그러면 부서질 것이다’(「공구와 무기. 2」,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7, 73쪽)의  희망을 반복해서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가파른 벼랑’, ‘칼날 같은 경계’(「경계」,  『인간의 시간』, 창작과비평사, 1996,  24~5쪽)의 아찔함을 타전할 뿐이었다. 변명도 없는 그 뜨악한 단절 앞에서 사람들은 당황했다.  성급한 사람들은 그가 ‘역사’를 피해 ‘산’으로 숨어버렸다고 질타했고 웅성 깊은 사람들은  끝내 그가 우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으로 마치 끊어질 듯 느리게 이어지면서 울리는 그의 노래는, 제각각 자신이 선 자리에 묶여있는 그 질타와 믿음 모두를 비켜가는 것으로 보인다.  먼 곳에서 시로 쓴 편지가 전해지면서 마치 우공의 삽으로 산의 자리가  옮겨지듯이 그의 언어와 침묵에 의해  혁명의 자리가 조금씩 옮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바람이 들어와 앉고
    구름이 들어와 앉고 새들 날아와 앉고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눈보라 휘날리고
    나 아닌 것들이 다 다녀가고
    시간은 마침내 그 자리조차 지우고
― 「느티나무」 부분, 『초심』

   『길 밖의 길』은 『초심』의 주제와 그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것과 겹치듯이 서둘러 다르게   그 주제를   개시하는 다른  반복구,  즉  알레그레토  조(調)의 리토르넬로(ritornello)이다. 그의 행보는 안단테 조(調)를 벗어나 빠르게 움직인다. 바람의 시간이 대지의 시간을 대체한다.


2

   『인간의 시간』까지 ‘바람’은 ‘몸 기억을 깨뜨’(「눈 위에  부른 바람」)리는 환기의 힘으로, 외부적 자극으로 남아  있었다. 이때까지 시인은 삶과  혁명을 여전히 ‘불씨’, ‘불꽃’으로 사유했다. “우리는 장작불 같은  거야 / 먼저 불이  붙은 토막은 불씨되고 / 빨리 붙은 장작은 밑불이 되고 / 늦게 붙는 놈은 마른 놈 곁에  / 젖은 놈은 나중에 던져져 / 활활 타는 장작불 같은 거야”(「장작불」,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 9쪽)의 시상은 12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태양이 불을 붙였다 / 들은 산화를 시작한다 / 초록의 불꽃이 불꽃을 전한다 / (…) / 노랗게 푸르게 붉게 불길이 번진다 / 들에서  산으로 산에서 물로 / 연료와 산소를 품은 대지에 해가 불을 가져왔다 / 옮겨 활활  타오른다 / 대지에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 그것은 피워올리는 거다”(「모두가  불꽃이다」, 『인간의 시간』, 창작과비평사, 1996, 48~49쪽)에로 연속된다.  혁명을 이해하는 이 원소론적  사유에 비할 때 다음과 같은 시적 사유는 분명 하나의 커다란 전환을 보여준다.

    바람은 무수한 줄기와 가지와 잎을 가졌다
    잎새마다 무수한 생명을 달고
    소용돌이치며 가지로 줄기로 잎새로
    숨을 전한다 생명을 전한다
    나무였다 바람은 무수한 나무였다
    생명은 소용돌이였다 소용돌이는 우주였다
    저들이 가둔 것은 바람이었다
    권력은 저 소용돌이를
    미치도록 싫어하는 것이다
― 「바람은 한 그루 나무」 부분, 『초심』

   『길 밖의 길』은 ‘불씨’에서 ‘바람’으로의 전환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바람은 원소가 아니라 기압, 기온, 방향 등의 차이에서 생기는 발생적 존재이며 그 차이가 생산하는 실재적 힘이다. 따라서 그것은 관계이면서 동시에 존재이다. 『초심』에서 단초적으로  발견되었던 바람의 사유,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람­되기는 『길  밖의 길』에서 한층 심화된다. 그것은 더 이상 환기나 자극의 힘으로 외부화되어 있지  않고 생명과 삶 속으로 내재화된다. 이러한 전환은 두 종류의 바람에  대한 구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밖에서 부는  바람’과 ‘마음에서 이는 바람’의 구분. 전자는 우리를 휩쓸  뿐이지만 후자는 우리를 단결시킨다.

    우리들 사랑도 때로는 밖에서 오는
    바람 앞에 날개를 꿈꾸기도 하였으나
    그렇게 밀려온 것은 그렇게 또 쓸려갔었네
    가슴에서 따스운 바람 일고
    마음 깊은 곳 맑은 지혜의 샘 아니면
    이제 희망을 말할 수 없네
    생의 활력과 지혜의 연대
    저 큰바람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는 따스운 바람 아니면
    폭풍도 소용이 없으리
    희망을 말할 수 없으리
― 「태풍」 부분

   바람은 경계를 허물고  경직된 것을  전복하는 힘이다.  그것은 ‘산’을  ‘골짝’으로, ‘강’을 ‘산’으로, ‘마을’을 ‘돌무덤’으로 뒤바꿀 뿐만 아니라 나무 그늘 아래 눌려 있던 ‘풀씨들’을 ‘키 큰 나무’ 너머로 비행토록 하여 ‘바다 건너’ 키 큰 나무들이 무너진 자리에 내려앉게 만든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는 내재성의 바람은 ‘생의 활력과 지혜의 연대’를, 전 지구적 희망을 말하게 하는 힘이다.


3

   내재성의 바람에 깃든 생의 활력은 실체화된 대상이 없는 실재라는  의미에서 ‘자재(自在)’의 힘이다. 그것은 “마음은 한 점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 몸 밖의 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 아무리 껴안아도 바람뿐인 몸 / 살은 저만큼 빠져나가고 바람으로 남은 몸”(「바람도 없이」)이다. 이 ‘자재’의 사유, 즉 관자재(觀自在)의 수행이 『길 밖의 길』을 이끈다. 그래서 시인은 여러 번 이 주제의 변주를 제시한다. 예컨대 「씨앗 한 알에」는  넝쿨의 비유를 통해, 그도 모자라 불꽃놀이의 비유를 통해 이것의 좀더 가시적인 형상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넝쿨은 자라 전부를 부수어
    하나 또 하나가 되지만
    그 하나는 다시 전부가 되어간다
    안으로 자재하고
    밖으로 관계한다
    안으로 마음에 이르고
    밖으로 몸을 펼쳐 둥근
    생명의 넝쿨이 된다

    그것은 부서지면서 완성되는
    허공에 터지는 불꽃놀이 같다
― 「씨앗 한 알에」 부분

   시인은 이 씨앗 한 알의 움직임에서 생명의 율동을 보듯 플라타너스 새순에서 생명의 노래를 듣는다. 중요한 것은 이 자재의 노래가 수직으로  치솟는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울림에도 불구하고 어떤 위계적 이미지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인은 봄날 돋는 그 새순의 떨림에서 입학식날 풍금을 놓고 불렀던 우리의 노래를, 존재의 파동을 듣는다.  
          
    나무야, 네 몸 속에서 일어나는 이 봄날의 떨림이
    우리가 옛적에 불렀던 그 노래가
    연둣빛 새잎으로 재생되는 것은 아닐까
    나무야, 오늘 네 노래 내 몸에 다시 새겨져
    언젠가 누가 다시 발굴하게 될 테지

    존재는 파동이라고도 했지
    저 봄날 새순들은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때로는 존재가 노래라네
― 「노래」 부분

   존재는 파동이고 음악이어서 공통(共通)을 생산하는 노래일 뿐 초월적이고 보편적이어서 위계를 구축하는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그렸듯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는 바람, 즉 모든 것을 향하여 열리는 공통의 움직임, 수평적 관계의 흐름이다. 『인간의  시간』에서 나타났던 이육사적 절정의 시간, 그 첨예함의 시간은 이제 한용운적 님의 시간, 그 넉넉함의 시간에 길을 비켜준다. 경계를 넘은 연대의 움직임, 공통의 움직임이 시편들을 횡단한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연’은 ‘바람에게 말을 거는 전화기’(「연」)이며, ‘달’은 ‘밖에 내다 건 생의 안쪽’(「달」)이다. 이 파동의 시각 속에서 언양장에 나와 있는 고추, 토마토, 호박, 조롱박, 참외 모종들은 밥상에 오를 먹잇감으로서가 아니라 ‘식구’로 사고된다(「봄날에」). 이때 삶은 문득 ‘표류’의 얼굴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방황’과는 전혀 다른 색깔을 띤다.

    흙탕물이 솟아나고 바닥을 뒤집으며
    큰 풍랑이 일고 둑이 터져버렸네
    세월, 그렇다네 시간은 스스로 범람하고
    스스로 폭발하고 또 표류하는 것
    그리하여 삶은 표류의 연속이었지  
    숱한 세월 흘러 나 잠시 잠잠하게  
    표류하면서 수면 위에 떠올라 오는
    그림 하나 보네 푸른빛 수채화 한 장
― 「세월」 부분

   여기에서 우리는 ‘표류’의 형상을 통해  희소성의 논리 속에 감추어져온 삶의  충만을 엿볼 수 있다. 분초를 다투도록  강제되는 노동-시간의 밑에서 흐르고 있는  것은 충만하다 못해 범람하고 폭발하는 삶-시간으로서의 세월이며 표류는  그 충만의 세월을 사는 기술이다.


4

   자본은 우리의 등을 계속 떠밀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영토에의 정착을 강요한다. 시인은 이 영토화의 힘을 거슬러, ‘표류’를 멈추어야 할 것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법으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붉은 실로 설정한다.
   그래서인지 『길 밖의 길』에 스며 흐르는 표류의 정서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이제 존재의 이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은 거짓
    저 꽃이 건너온
    강 건너 손을 내밀어보네
    수평선 너머 불어오는 바람을 안아보네      
― 「그곳에 매화」 부분

   강 건너로 손을 내밀고 불어오는 바람을 안아보는 것. 이렇게 자재는 그리움으로 존재한다. 그리움은 ‘바람도 없이’ 일기도 한다(「바람도 없이」). 물론  그 그리움이 실은 바람의 노래임을 시인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는 바람이 몸을 지나가게 놓아두리라’(「바람도 없이」)고 다짐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리움은 불화했던 세상(「용서」)을, ‘세월의 무덤’(「물무덤」)을, 그리고 ‘어느 한곳은 모자라고 모서리 하나는 부서지고 허물어진 사람들’(「영천 완산 시장」)을 향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그리움이 분노를 이기며 강력한 사랑의 정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동해남부선」) 가는 ‘거친 손’을 가진 옛 친구의 고됨을 나누려는  안타까운 몸짓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지나간 날들이여. 오 슬프고 어두침침하고 창백한 것보다 더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이더냐. 나는 사랑이 아니라 분노를 택하였네. 처음 그것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으나 내 사랑은 분노의 불길로 인해 깊은  화상을 입었네”(「전하동 산번지」)라는 각성의 음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백무산의 시에서 분노는 자리를 잃는가? 적어도 ‘욕망의 분배’에서 시작하고 또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분노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생존을 분배받기 위해 화염병으로 저항하고 생활을 분배받는 일로 쇠파이프로  무장하는 일이 어쨌단 말인가? 그러나  욕망을 분배받는 일은 벼랑으로 가는 일, 노예 되기를 동의하는 일, 저 강물을 배반하는 일, 나무를 능멸하는 일, 저들과 공범이 되는 길,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왜 파업을 하느냐고,  다시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제는 달라야 한다고.”(「욕망의 분배」, 『초심』,  130쪽).
그 다른 대답은 2004년 5월 1일 114번째 노동절에 바친 시  「스스로 미래가 되어라」(『매일노동뉴스』, 2004년 5월 3일)에서 암시된다.

    자본의 분배,
    욕망의 분배,
    소비의 분배로,
    노동자의 영혼을 팔지 말라!
    우리의 요구는 진실한 삶이며 아름다운 생명이며
    고귀한 영혼이지 저들 욕망의 부스러기가 아니다
    인간을 착취하는 자가 자연을 착취한다
    우리는 저들 뭇 생명과도 평등을 원한다
    모든 생명이 하나 되는 기쁨의 축제를 요구한다
― 「스스로 미래가 되어라」 부분

   모든 권력을 자신의 발 아래 종속시키고 단결만으로 세상을 구하는 그리움의 전사들, 사랑의 전사들에게 분노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뭇 생명들이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막는 차별과 혐오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준비된 폭력, 신의 정의와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침략, 시혜로서의 사랑, 이런 사랑을 재생산하기 위한 차별적 혐오, 모든 평화를 제압하고서야 오는 권력의 평화가 그것이다.

    전쟁이냐 평화냐가 아니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혐오다
    차별의 혐오는 이미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
    차별의 전쟁은 우리 안에서 들끓어 올라
    생계수단을 차별화하고 국가이데올로기를 복제한다
    무한경쟁의 자본은 무한차별의 혐오화다
    그 서열은 국경을 넘어 제국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다시 우리 안에서 복제된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차별적 혐오다
― 「혐오」 부분

   그러나 이제 분노의 비판은 사랑의 테크놀로지에 속할 뿐 그 자체로 자립적인 것은 아니다. 욕망을 분배하려는 차원, 권력을 놓고 겨루는 차원을 벗어나고 나면 분노는 자립성을 잃는다. 겉으로 보면 마치 『미포만의 동트는 새벽을 딛고』(1990)로 돌아가는 듯한 이 산문화된 시적 고발의 지점에서 시인이 자신의 시작(詩作)의 시적 위치를 다시 한 번 밝히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산란을  마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  배를 뒤집고 처음 본 그 하늘 다시 본다 / 그러나 아직은 회향이 아니다”, “달은 한 번도 / 같은 달이었던 적이 없었다”(「회향」)고 표현되는 이 단호한  다름의 선언은 바람과 표류와  그리움과 사랑이 불가역의 것임을, 그의 옛 자리 그래서 그곳으로의 ‘돌아옴’을  기준으로 한 비난들이 표적을 빗나갈 것이고 그러한 기대들이 채워질 수 없으리라는 강력한 응답인 듯하다.

    가을 물살 헤치고 거슬러 오르는
    황어의 속도로 오르던 날들 있었지
    그러나 그것은 밖으로 흐르는 속도의 표류

    나는 나를 놓아 낙하를 시도했네
    그것은 직진낙하 폭포의 속도

    바닥에 발 닿는 소리에 놀라
    올려다보니
    우주의 무게로 퍼붓는 속도
    돌아보니 달리는 건 내가 아니라
    세상이었고
    폭포는 구심에서 무섭게 달려가네
    정지의 속도

    나무처럼 뜨겁게
    달려가는
    역의 속도!
― 「역의 속도」 전문

   「혐오」와는 달리 간결한 어조로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이 시에서 표류와 유목, 그리움과 사랑은 역설적이게도 정지의 이미지와 결합한다. 무서운 속도는 세상의 속도였고 ‘나’의 낙하 속도는 실제로는  정지의 속도였다. 사람들이  돌아나오는 길로 들어감으로써(「운명」) 발생하는 ‘역의 속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죽음으로서의  정지가 아니다. 그것은 ‘나무처럼 뜨겁게 / 달려가는’ 고요의 힘이다.


5

   이 뜨거운 질주는, 이 바람의 표류는,  그 사랑의 그리움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응답해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는 『길 밖의 길』의 새로움을 밝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길은 광야의 것이다』에서 ‘그대’의 출현을 본다.  그곳에서 ‘그대’는 ‘그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나는 강으로  가야 한다 / 그 푸른 강물엔 그녀가 살기에 / 그곳에  가면 지친 내 의식에  젖을 물리기에”(「그녀가 사는 곳」, 『길은 광야의 것이다』, 창작과비평사, 1999,  48쪽). ‘그녀’는 강에 뿐만  아니라 숲에도 살며 노동의 대지에도 산다. “나는  마침내 대지로 가야 한다 /  내 노동의 대지에 그녀가 살기에 / 내가 기꺼이 땀을 뿌리면 생명의 잔뿌리들을 / 다  받아주고 내 잠깬 몸에 생명의 / 어린 싹을 키우도록 젖을  물린다 / 나는 가야한다 그녀가  사는 곳”(같은 책, 49쪽). 이 강박 같은 그리움이지만 그것은 『초심』에서까지는 ‘기다림’으로 나타날 뿐이다. “간밤에 몇 번인가 / 잠에서 깨었네 / 후둑 후두둑 후두둑 / 늦가을 빗소린가 / 창을 열고 손 내밀어 보지만 / 별은 맑고 바람도 없는데 / 온단 말 없던 사람 생각 / 홀로 설레네”(「그대 없이 겨울이 또 왔네」, 『초심』, 실천문학사, 2003, 16쪽). 『길 밖의 길』이 이 두 시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대’의 문제가 하나의 화두일 뿐만 아니라 중심 화두로 등장하고 또 그것이 ‘기다림’의 모습이 아니라 적극적인 ‘찾아  나서기’의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그대 가신 나라에서」가 옛 어조로 조용히 그리움을 다시 한 번 노래한 후에, 돌연 그 고요한 그리움의 시간을 깨는 행동의 시간이 펼쳐진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네가 내게로 온다고 꽃이 피는 건 아니야’라는 각성이다.
    
    언제 저리 피었나
    그저께가 입동인데
    대문간에 한 그루 산수유나무

    앙상한 가지마다 돋은 망울들
    뽀얀 털 뒤덮인 꽃망울들
    산엔 아직 나무들 낙엽도 다 떨구기 전인데
    한겨울이 오기 전에 이미 꽃망울 다 이루고
    기다린다네 봄날 같은 너를 기다린다네
    네가 내게로 온다고 꽃이 피는 건 아니야
    꽃망울을 내 가슴에 다 이루기 전에
    나를 버리고 너를 사랑한다는 맹세는 헛되다

    내가 나를 통과하지 않고
    어찌 너를 만나랴
    너를 만나 꽃을 피우랴
    이 겨울 다 건너기 전에
    네게로 이르는 쉬운 길로 나는 나서지 않으련다
― 「네게로 가는 길」 전문

   둘째 연과 셋째 연 사이에서 급격한 반전을 이룬 후 넷째 연에서 시인은 ‘나를  버리고 너를 사랑한다’는 맹세의 헛됨을 꼬집고 ‘나’를 통과하여 이루는  만남, 꽃을 피울 만남을 위해 ‘네게로  이르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에서 좀더 영롱한 형상을 얻는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봄날 꽃길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좋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이어도 좋다
    비바람 폭풍 벼랑길이어도 좋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그대는 그곳에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이어도 좋다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이어도 좋다
    왁자한 저자거리 진흙길이라도 좋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꽃을 들고도 가겠다
    창검을 들고도 가겠다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

    모든 길을 열어두겠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일 수 없다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 전문

   첫째 연과 둘째 연에서 「네게로 가는 길」의 주제가 반복된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일 수도 ‘비바람 폭풍 벼랑길’일 수도 있는 길이기에 쉬운  길이 아니다. 넷째 연에서 길은 ‘비단길’, ‘새벽길’, ‘진흙길’로 다양화한다. 그리고 다섯째  연에서 그 길과 나와의 관계가 선연하게 드러난다. ‘나를 통과하는 길’, ‘나를  지우고 가는 길’,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로. 일곱째 연에서 마침내 방법의 다양성이,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님이 선언된다. 그것은 길 밖 허공의 길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결의를 허용하는 길이다. ‘꽃을 들고도’,  ‘창검을 들고도’, ‘피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갈 수 있는 길이다. 이 무수한  길들을 허용하는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며, 그곳에 그렇게 늘  있지도 않은 ‘일렁이는 바다’, ‘출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대’의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얼굴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대한 것, 총체적인 것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것을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할 위험마저 있지 않은가. 다행히 시인은 그것을 미지의 것으로 남겨놓지 않는다. 시인이 우리에게, 끊긴 길 위에서 이미 만나 본 ‘그대’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해주기 때문이다.
  
    길이 끝나는 길에 나는 앉아 있었네
    나도 끝이 나서 할 일을 잃었네
    둑은 터지고 마을은 물 아래 있었네
    사람길 다 끊겨 적막한 밤에
    끊긴 길 위에서 밤을 지새네
    나와 오래 한몸이던 이 길이
    이 밤 이리도 낯서네    

    이대로 이 적막 위로 동이 트는데
    아무도 없는데 누가 날 쳐다보는 듯
    자꾸 귓불이 가려웠는데  
    낮은 길섶 안개 속에 구절초 한 송이
    옅은 햇살에 뽀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네
    저리도 따스웁게 날 보고 웃는 꽃 한 송이 아,
    저 꽃 한 송이가 나를 일으키네

    아하, 언젠가 우리 어디선가 어디에선가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내 곁에서
    눈을 반짝이며 말없이 오래 머물다 간 사람
    이렇게 다시 만나네
    금생에 이렇게 다시 만나네
― 「꽃 한 송이」 전문

   딱딱한 각운으로 결의의 단단함을 밝힌 「너에게 가는 모든 길」과는 달리, 부드러운 각운을 따라 노래처럼 흐르는 이 시에서, 놀랍게도, 첫째 연의 아득함을 쓸어내며 ‘나’를 일으키는 둘째 연의 따스함, 그 ‘바다의  얼굴’은 ‘낮은 길섶 안개 속에 핀  구절초 한 송이’였을 뿐이다. 구절초 한 송이가 ‘낮은’ 길섶에, 그것도 ‘안개’ 속에 피어 있다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그 구절초가  ‘반짝전구를 창문에  달아주었더니 정말  좋아라 환하게 웃’다가 어름처럼 싸늘하게 식어간 ‘전하동 바닷가 공단 산동네  무허가 산번지’(「전하동 산번지」)의 그 아이임을, ‘몸밖에 가진 것 아무 것도  없는 여자’(「바람도 없이」)임을, ‘가진 것이 없는 자들’(「혐오」) 그래서 전태일, 박일수, 김주익처럼 불길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럴  줄 알았으면」)임을,  아버지의 초조를 잠재웠던 ‘과부조합장’(「문병」)임을, ‘흙 묻은 고무신에 낡은 몸뻬 / 한 다리는 절고 한 팔은 손목에서 꺽여 / 제멋대로 떨’며 가는 ‘저기 한 할머니’(「착각 또는 착오 그리고 착취」)임을, 그리고 ‘아직 비바람 천둥’ 속에 있는 ‘내 삶’(「가지 않으리」)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낮은’ 삶들은 스스로 겪는 자들에게도 얼마나 낯설고 또 슬픈가.  그러나 시인은 이것들이야 말로 ‘내 텃밭에 핀 꽃들’이고 ‘날 찾아온 꽃들’임을 놀라움 속에서 받아들인다.
    
    내가 가꾼 텃밭에 잡초만 무성하네
    내가 심어 싹을 틔운 것은
    그늘에서 햇빛도 받지 못하였네

    잡초들만 꽃을 피워 가득하네
    내가 가꾼 것은 꽃망울도 맺지 못하였네

    내가 꿈꾸어 온 것은 어디 가고
    낯선 것만 내 텃밭에 뿌리 내렸네

    어쩌다 이리 낯선 삶만 무성한가

    그래도 저것은 모두 내 텃밭에 핀 꽃들
    저 꽃들 모두 날 찾아 온 꽃들

    뱉고 나면 언제나 낯선 말처럼
    삶은 낯설어 슬프고 놀라운 것
― 「슬프고 놀라운」 전문

   ‘그대에게 가는 길’은 그 어떤 초월적 구도의 몸짓일 수 없다. 그것은 그 스스로 ‘잡초’인 시인과 우리들 모두가 ‘낯설어 슬픈’ 삶들을 놀라워하며 잡초들의 ‘텃밭’을  가꾸는 일일 뿐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가꾸어지는 텃밭이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넘어 풀, 나무, 강, 눈, 달, 요컨대 모든 존재의 바람이, 그리하여 ‘모든 생명이 하나 되는 기쁨의 축제’(「스스로 미래가 되어라」)를 벌이는 자율-자재의 공간을 열어가는 것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여 백무산의 시들은 지금까지 국가권력에 혼을 빼앗겨 그 주위를 불나비처럼 맴돌다 스러져 갔던 혁명들의 자리를, 뭇 생명들과 다중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몸에서 몸으로 이는 바람의 자리로, 낯설어 슬픈 저 놀라운 삶의 자리로 묵묵히 옮겨 놓고 있다. 아마도 그는 결코 옛 시절의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단 한 순간도 혁명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며, 또 그가 지금 혁명이 스러진 반동의 황야에서 다른 혁명적 가치들을 재구축하고 그것들을 전진시키려는 구성의 노동에 매혹되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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