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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은 책을 냈지만 이 평론집만큼은 여느 책들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15년 만에 냈다는 것도 그렇지만 평론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는 존재 증명을 하는 것 같은 의미까지 부여하고 싶습니다."

제목 없음

 

 

 

▲ 15년만에 평론집을 낸 조정환씨.

 

ⓒ 조성일

 

<카이로스의 문학>(갈무리 펴냄)이라는 다소 어려운 제목을 단 평론집을 낸 '조정환'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낯설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운동권 출판사인 갈무리의 시리즈물 '갈무리 신서' 중 크리스 하먼의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1995)이나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성격논쟁>(1995), 안토니오 네그리의 <디오니소스 노동·1>(1996), 워너 본펠드의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1999) 등을 우리말로 옮긴 '이원영'이 더 낯익은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원영은 "시민적이고 평화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이고 좌파적인, 권력을 위해 투쟁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 활동 방식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는" 멕시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을 우리나라에 소개했던 바로 그다.

박노해 시인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는 문학잡지 <노동해방문학>(1989년 창간) 때문에 수배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조정환이었던 그가 이원영으로 살 수밖에 없었고, 1999년 말 수배에서 해제되자 다시 본래의 조정환으로 돌아가 '자율주의'와 '들뢰즈 맑스주의'의 보급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그가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비판>(연구사, 1989), <노동해방문학의 논리>(노동문학사, 1990)에 이어 15년 만에 세 번째 평론집을 상재하면서 '삶문학'이라는 화두를 들고 나왔다.

평론가 조정환(50)을 2월 22일 그가 활동하고 있는 서울 서교동의 다중네트워크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15년 만에 낸 평론집

"그동안 많은 책을 냈지만 이 평론집만큼은 여느 책들과 다르게 느껴집니다. 15년 만에 냈다는 것도 그렇지만 평론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는 존재 증명을 하는 것 같은 의미까지 부여하고 싶습니다."

 

▲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은 조정환씨.

 

ⓒ 조성일

조정환의 소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배자 시절, 그는 이원영이라는 필명으로 번역이나 기고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유독 문학평론만큼은 하지 못했다.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학평론의 특성상 글을 발표하면 설령 필자의 이름이 다르더라도 분석 성향으로 보아 수배당한 조정환이라는 것쯤은 쉽게 탄로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독자들의 반응이 몹시 궁금하다면서 얼마 전에 나온 백낙청 교수의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창비)보다 잘 나가는 것 같다는 출판사 영업부의 전갈에 조금은 고무돼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책제목이 너무 어렵다고 하자, 그 역시 기자의 반응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설명하려 애쓴다.

그가 애초 이 평론집을 구상할 때 정해둔 제목은 '경향을 넘어 존엄으로'였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책을 묶으면서 이곳저곳에 자문을 구하고 다시 생각해본 결과 너무 해묵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 '카이로스의 문학'이라는 어려운 이름을 선택했다고 했다.

시간에는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 Chronos)도 있고, 의미 있는 시간(카이로스 KairÒs)도 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길이, 시간의 충족, 측정된 시간과 같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말하는데, 영어로 연대기인 'chronicle'이나 'chronology'가 여기서 비롯됐다. 반면 '카이로스'는 시간의 순간, 시간의 도착, 시간 속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의 시간, 즉 신학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의 시간을 일컫는다. 그런 점에서 조정환이 고른 '카이로스의 시간'은 무슨 의미일까?

노동해방문학에서 삶문학으로

 

▲ 노동해방문학에서 삶문학으로의 전환을 한 조정환씨.

 

ⓒ 조성일

조정환은 '카이로스의 문학'을 '삶문학'의 동의어로 생각한다고 했다. 문학은 대중의 사상과 정서를 이끄는 전위활동이 되어야 한다며 첨예한 언어와 단정적 문체로 '노동해방문학'을 외치던 조정환의 수사법이라면 일면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단단했던 모든 것이 녹아내렸죠. 한국의 권위주의 권력도 무너지고, 실존하던 사회주의의 권력도 실패로 돌아갔잖아요. 그래서 저의 관심사는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것들'이 기초해 있는 '삶'과 문학의 만남을 탐구하는 것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조정환은 문학이 '객관현실'의 관념에 묶이지 않으면서도 삶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고 했다.

고민해본 결과, 1990년대 이후 삶의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노동해방문학을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들었으며 실재로서의 삶을 현실성(actuality)의 차원으로 환원해 왔음을 깨닫게 했다. 문학 역시 자본에게 포섭되고 있는 역사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학 잠재력의 실현이 곧 삶의 안보, 삶의 건강의 실현과 같은 궤도에 놓인 시대임을 자각했다고 했다.

그래서 조정환은 지금까지 지구화가 세계적으로 통합된 생산, 세계시장, 제국적 주권형태의 창출을 가져오고 있고, 그것이 민족문학의 주체성 이념의 기반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민족문학이 여전히 유효하다거나 민족문학의 재건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미 산초 판사를 잃은 돈키호테 같은 형국이라고 비판한다.

박노해와 서정주

조정환은, 1988년 무렵 처음 만나 1989년 <노동해방문학>을 함께 창간하는 등 "매일 뭉쳐 다녔던" 막역한 동지였지만 요즘은 만나지 않는 박노해 시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조정환은 누구인가

 

 

 


당시 주류였던 민족문학론에 대항하여 '노동해방문학'을 제창하며 1989년 <노동해방문학>을 창간하는 등 문학운동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던 조정환은 1990년 말 '국가보안법'에 의한 전국지명수배가 내려지자 '이원영'이란 필명과 합법적(?)으로 취득한 운전면허증의 또 다른 이름으로 살다 1999년 말이 되서야 자신의 본명을 되찾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고에서 2년, 공군사관학교에서 4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던 조정환은 대학원 박사과정에 다니던 1986년 '민미연(민중미학연구소) 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했었다.

애초 수배 상태에서 잡지를 낼 각오를 했던 조정환은 1989년 3월8일 가출(?)했고, 그해 8월14일,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병원에 다녀왔다가 조직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 '제국 속에서(Within Empire), 제국에 대항하여(Against Empire), 제국을 넘어서(Beyond Empire)'라는 의미의 다중문화공간 '왑'(WAB)을 재편한 다중네트워크센터(MNC)를 통해 다중지성들과 접속하고 있다. 아울러 웹저널로 펴내는 <자율평론>의 오프라인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지구제국>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 <아우또노미아> <제국기계 비판> 등을 쓰는 한편 홀로웨이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네그리의 <미래로 돌아가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 등 많은 책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조정환은 박노해 시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후 시적 긴장이 많이 떨어졌다면서 박노해 시인이 변한 것 같다고 했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정리해고를 무조건 반대할 때, 박노해 시인은 이 시기를 놓치면 세계 경제 속에서 우리나라 미래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했었죠. 박노해 시인의 반문에는 인간의 존엄보다 시장의 존엄을 더 중시하게 되는 박 시인의 가치관의 변화가 깃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조정환은 생존단계의 산물인 '고르게 부자인 삶'에 대한 꿈 대신 '고르게 덜 벌어서 덜 쓰는 삶'의 꿈을 지녀야 한다는 박노해의 문화론은 "시장의 몸통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시장 섭생의 논리"라고 비판했다.

또 조정환은 친일시비가 끊이지 않는 서정주 시인에 대해서도 "그가 죽지 않았다면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지도 모른다"로 시작하는 분석글의 다소 냉소적인 서두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은 처음에는 사회주의 맛도 보고, 민족주의자 행보를 걷기도 합니다만 결국 선택적 친일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조정환은 서정주 시인의 해방 이후 행보를 보더라도 친일정권인 남한 정부를 치켜세우고, 전두환을 미화하는 등 1930년대 이후 늘 국가권력을 편들면서 한국문단의 주류로 활동해왔다는 점에서 극복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물론 서정주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근거가 되는 깊은 감화력을 갖고 있는 순수서정시에 대해서는 정치한 미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감화력의 정체가 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면서도 "서정주는 지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네그리와 자율주의

 

▲ 자율주의자 안또니오 네그리를 사숙하고 있다고 말하는 조정환씨.

 

ⓒ 조성일

 

<노동해방문학>의 복간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조정환은 대중노동자들의 집단적 지지나 전위적 리더십 같은 당시 <노동해방문학>을 가능케 하던 조건들이 다 사라져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경찰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를 의식하며 살았던 조정환은 "나는 실제로, 감옥과 삶의 나머지 부분 사이에 어떤 실질적 차이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탈리아 자율주의자 안또니오 네그리를 사숙하고 있다고 했다. 네그리는 이런 글로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어떤 사람이 삶을 의미 있는 무엇으로 만들지 않으면, 혹은 삶의 시간이 파악되지 않으면, 삶은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감옥 안에서나 감옥 밖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다. 감옥은, 삶 자체가 자유가 아니듯이(노동자들의 삶의 생각해보라), 자유의 결여가 아니다."

또 조정환은 "이전의 지식인들을 지구적 생산의 네트워크에 재배치"하는 오늘날 정보사회의 지식 노동자의 전형적 존재형태인 네트에 연결되어 일하는 '네트워커(networker)'에 관심이 많다.

"매우 파편적이고 개인적이고 이질적인 특질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들 네트워커들은 "중앙집권적 집단화, 단일한 목표, 통일된 조직원리, 통일된 운동 방향이라는 전통적 혁명 경험"의 기준에서 보면 구성에서는 복수적·혼성적이고, 조직화에서는 다원적이고, 형태에서는 다형적이고, 윤리에서는 다가치적인 존재, 즉 '다중(multitude)'으로 존재한다.

국가영역에서 벌어지는 정치과정 대신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 특별한 관심이 갖는 이들 다중에게서 조정환은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가 나타난다"는 맑스의 말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조정환은 지난 시절 혁명적 지식인들이 삼았던 좌우명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를, 현대의 다중은 이렇게 바꾸어 놓는다고 했다. "자유인가 수인(囚人)인가".

 

 

 

2006-03-02 17:25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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