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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다중의 중얼거림

Pourparlers



제국은 늘 붕괴하고 있다. 제국의 특징은 자기 붕괴를 자기의 먹이로 삼는 역사상의 특이한 지배형태다. 「제국」의 마지막 부분에 부패에 관한 얘기가 등장한다. 위기를 통해서 살아나가는 존재로서의 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다. 제국은 늘 붕괴하고 있지만, 그것은 제국의 자기붕괴가 아니다. 제국으로부터 분리하면서 우리의 삶을 우리가 회복하는 운동 속에서만 제국은 진정으로 늘 붕괴할 것이다 =========>메인페이지용

하승우-조정환 대담

두발 자율화, 교복 자율화, 등록금 자율화……. 『아우또노미아』(조정환 지음, 갈무리)의 서문에 열거된 이러한 예시들은, 우리와 ‘자율’의 에너지를 한참이나 떨어뜨려 놓았다. 자율을 저항의 언어로 알지 못했던 우리다. 자율을 창조의 언어로 알지 못했던 우리다. 조정환은 안또니오 네그리의 삶과 사상을 정리해 놓은 이 책 『아우또노미아』를 통해 그것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말한다.
조정환과의 대담에는 하승우(정치철학 전공, 경희대)가 나섰으며, 책의 안과 밖에 관해서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하승우 : 당신 삶의 궤적과 네그리의 그것이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네그리와의 공통점을 녹여내서 쓴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자세로 네그리를 평가하기 위한 것인가?

조정환 : 삶의 궤적이 유사한 것은 사실일 거다. 그러나 그것이 네그리를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니다. 거꾸로, 공부를 하다보니 유사성이 발견됐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말이다. 또한 ‘유사성’이란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사회주의 운동이 자신의 내적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면서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공통의 문제의식과 갈등을 겪었다. 굳이 말하자면, 경험의 인류사적 유사성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사노맹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경험과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감당해야 했던 문제의식 및 운동의 전망에 대한 심정적 열망을 네그리가 선배로서 농축해서 잘 표현했다. 그래서 나는 힘을 얻었고, 과거에 대한 회의와 후회보다는 미래를 위한 희망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네그리는 하나의 동력이다. 맑스와 더불어 이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 마르지 않는 샘이다. 따라서 네그리를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전에 ‘내가 읽은 네그리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다. 「제국」 출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네그리에 대해서 찬반의 입장을 취했지만, 그의 전체 사상 속에서 평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찬성하는 쪽에는 더욱 깊이 있는 힘을, 반대하는 쪽에는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논쟁이 더 깊어지고 소모전이 극복되길 바란다.


하승우 : 아나키즘과 네그리의 지향이 비슷함에도 네그리는 자기에게 드리워진 아나키스트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나키즘을 지나치게 비판하는 듯하다. 그 결과, 네그리의 아나키즘 비판은 아나키즘에 대한 또 다른 오해를 낳게 되는 것 같다. 주관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반생산적 관점이 아나키즘의 모든 것인 양 읽어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인터뷰(오마이뉴스)를 통해서 아나키즘과 자율주의의 간격이 점차 좁혀지고 있는 단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가장 큰 변별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협력에 대한 자율주의의 강조라고 했다. 이건 네그리의 입장인가, 당신 역시 네그리와 같은 시선으로 아나키즘을 바라본 것인가.

조정환 : 아나키즘은 지도자를 부정하는 만큼 다양한 그룹이 형성돼 있으며 그들의 색깔도 다양하다. 그 중에서 코뮤니즘적 아나키즘 혹은 아나코 코뮤니즘의 경우, 자율주의에 많이 접근해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어원적 의미, 즉 ‘지도자가 없는without leader’이라는 말은 정치에 대한 네가티브한 정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도자가 없다는 것까지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 그 이후의 대안적 삶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나코 코뮤니즘처럼 코뮤니즘적 사유를 아나키즘과 결합시키려는 노력들이 등장한 거다. 이는 개념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 결과다. 내가 말한 아나키즘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아나키즘이다. 네그리가 이탈리아의 운동 흐름 속에서 아나키즘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취한 것은 1970년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 상당수가 레닌주의로 기울어 테러리즘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네그리가 ‘우리는 무정부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라고 못박긴 하지만, 아나키즘보다는 사회주의를 더 비판햇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이후 즉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새로운 입장을 채택한 사회주의자들의 노선과 아나키즘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졌다고 생각한다.


하승우 : 사회주의와 대립했던 아나키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제 1인터내셔널 때부터 맑스는 아나키즘을 배제했다. 또한 레닌은 많은 아나키스트들을 학살했다. 즉 사회주의에 의한 배제와 억압이 아나키즘의 역사다. 재미있는 혹은 모순적인 건, 네그리가 이론적으로 아나키스트를 비판하면서도 현실의 운동 속에서 아나키스트를 주목하는 태도다. 네그리가 사용하는 ‘투사’의 개념 속에는 실제로 많은 아나키스트들(대표적으로 스페인 내전 당시)이 포함된다. 또 「아우또노미아」에는 푸리에나 프루동에 대한 왜곡된 편견이 여전하다. 이러한 것들은 아나키즘을 지나치게 경직되게 해석하는 태도로 보인다. 다른 차원에서의 고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조정환 : 좋은 지적이다.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는 수십 년의 역사를 통해서 명확해진 부분이 있지만, 아나키즘은 지난 1, 2세기 동안 늘 마이너리티였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그 한계와 가능성을 쉽게 말할 수 없다. 다만 이론적 차원에서만 비판/수용되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결코 누락시켜서는 안될 역사적 성과물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 것인가를 짚어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생산력, 생산력의 협력적 발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적 힘’ 혹은 ‘인간의 주체적 능력’ 또는 내 식으로 말하자면 ‘활력’을 더 잘 구현할 수 있는 삶의 실현을 중심에 두고 아나키즘의 가능성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생산적 힘에 대해서 아나키즘은 생태주의와 결합하면서 원시주의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건 스탈리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이겠지만, 그래서는 현대 인류의 문제를 풀 수 없다. 인간들 사이의 더 밀도 높고 광범위한 협력관계를 창출하는 구상 속에서 아나키즘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의미를 가진다.


하승우 : ‘자율주의’라는 용어의 쓰임에서, ‘자율’과 ‘주의’가 과연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조정환 : 자율주의라는 명명을 방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이것은 한국적인 특수성에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이념운동이라고 하면, 이념적으로 먼저 평가하고 들어오는 경향이 지난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즉 자기 자신의 이념을 갖지 못한 것들은 운동으로 보지 않으려 해왔다. ‘자율주의적 정치’라는 식의 관형적 표현은 조금 애매하다. 그래서 아마 ‘자율주의’라는 용어가 더 널리 퍼졌을 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율’과 ‘주의’는 잘 맞지 않는다. ‘자율’에 비해서 ‘주의’는 어느 귀퉁이를 지칭할 수 있을 뿐이다. ‘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자율성/자율적인 운동들/자율적인 활동상들을 자꾸 이데올로기화․관념화시켜 두뇌 속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역작용을 일으킨다. 오토노미즘이라는 말은 사실상 거의 쓰이지 않는다. 따라서 ‘자율주의라고 하는 말 자체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편의적이고 방편적인 차원에서 자율‘주의’가 되었을 뿐이다. 방편이란, 강을 건너고 나면 버릴 배 아닌가. 버리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  ‘주의’를 생각해 달라.


하승우 : 핵심적인 개념으로 ‘계급구성’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조정환 : 이 책은 네그리 연구서로 씌어졌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이 전적으로 네그리의 것은 아니다. 내 나름대로의 독창적 가공이 들어가 있다. 한국어로 접근하면 모순되고 혼란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네그리의 용어들을 가급적이면 명확하게 정의하려 했다. 예를 들어, 네그리는 composition, constitution, formation 등을 구분해서 썼다. 이 말은 영어에서 구분되지만 한국어에서는 잘 구분되지도 않고,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제3자적 입장 혹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사회를 관찰하고 정의한다면, 편성이나 구성은 이미 계급투쟁이 전개되어 완성된 어떤 결과물을 의미한다. 그런 식의 분석에 쓰이는 용어 중 하나가 ‘사회편성’의 개념이다. 예전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구성체’의 개념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맑스도 사용하고 있다시피 ‘자본합성’이라는 개념이다. 결과물로 보자면,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form을 갖고 있으며, 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기술적 차원, 유기적 차원, 가치적 차원에서 자기 구성을 갖는다. ‘계급구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곳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사회 안에서 싸워나가는 사람들의 역동성을 어떻게 우리의 주체성으로 꾸릴 수 있는가, 라는 실천적/경향적 측면을 포착하기 위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하승우 : 노동자는 직접적으로 주체성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런 것들이 지금 세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실태의 문제인지 경향의 문제인지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가령, 리처드 세넷과 같은 학자는 팀워크와 같은 노동방식은 동료들이 서로 경계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으로서, 관리자에 의한 예전의 방식보다 더욱 교묘한 순응장치로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협동으로서의 노동과정 혹은 노동자의 주체성의 실현이라는 부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조정환 :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서 답변을 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는, 아우토노미아가 갖는 철학적 특징에서 봤을 때 이러한 질문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문학에서의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논쟁을 보라. 철학의 인식론에서는 반영론의 문제가 될 것이다. 개념이 외부에 있는 어떤 실재reality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이라는 게 19세기 이후 좌파운동의 지배적인 입장이었다. 이때 현실의 역동성을 제3자적 관점에서 분석해 들어가는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이미 거기엔 우리의 삶이나 실생활을 사물화시키는 경향이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주체성 실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오늘날의 사회적 노동자 혹은 다중이 처한 현실의 세부적인 부분을 열거하는 식은 대답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을 거다. 맑스는 「자본론」의 서문에서 자본이나 상품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미세한 현미경을 사용하더라도 혹은 아무리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사용하더라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바로 추상의 방법이다. 네그리의 경우, 추상이라는 말을 조금 바꾸어서 ‘추상적 경향’ 혹은 ‘경향적 추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사회적 노동자’를 생각해 보자. 사실 사회적 노동자라는 것은 맑스가 썼던 말이다.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가들은 기계를 도입하는 경향을 강화시킨다.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하려는 것이다. 또한 자본가가 경쟁에 의해서 잉여가치를 확대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내재된 필연적인 경향이다. 이 경향에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분업적 개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는 과정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적 노동, 노동의 사회화가 발전한다.
맑스는 기계를 생산에 응용된 과학기술로 봤다. 다르게 얘기하면, 이건 조직화된 인간의 지성이다. 곧, 지성이 생산 속에 organize되어 가는 과정이 바로 기계화 과정인 것이다. 이 기계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연결되는 경향을 갖는다. 맑스는 이런 경향이 이미 자신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소위 ‘머시너리 시스템machinery system’이다. 맑스가 경탄했던 것은, 말하자면, 런던에 들어선 거대한 방직공장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 보면 얼마나 후진적인가. 지금은 공장 내의 분업이라기보다 전지구적 세계시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광역적 분업 시스템이다. 오늘날의 사회적 노동의 장소는 공장이나 도시의 영역을 넘어섰다. 그럼 이제 아까 얘기한 팀워크의 문제를 살펴보자. 오늘날 ‘추상적 경향’ 혹은 ‘경향적 추상’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노동의 전지구적 네트워킹 속에서 보면 팀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미세한 방법론적 장치일 것이다. 사회적 노동 그 자체는 자본의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다. 자본에서 벗어날 경향성을 갖지만 자본에 의해서 통제되는 노동을 지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꼭 팀워크가 아니더라도, 노동이 이뤄놓은 분업적 협업의 전지구적 매트릭스 자체를 사회적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승우 : 분업적 협업의 전지구적 매트릭스가 새로운 질을 낳을 때 다른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테지만, 이것이 단순히 분업방식의 변화 차원에 그친다면 문제가 있으리라 본다. 또한 아직까지도 중심-주변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노동분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통제 양식이 아직 현존하고 있으며, 여성노동의 문제가 미해결인 채로 있다. 그렇기에 당신도 ‘착종’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떻게 하면 현실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질적 전환을 이룰 수 있을까.

조정환 : 노동의 재구성 과정 속에서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성격의 활동이 나타나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친 사람이 바로 네그리다. 맑스가 얘기한 ‘고정자본으로서의 사회적 노동’으로 돌아가 보자. 노동의 산업화 과정을 살펴보면 농업노동에서 제2차 산업노동으로 넘어갈 때는 인력, 구체적으로 근육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시기다. 그 이후 제3차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의 주된 담당 에너지는 본격적으로 지력과 정서력이 된다. 두뇌의 활동과 정서적 활동 같은 것 말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처럼 공장 하나 없이도 굉장한 이윤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부富를 가치화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의 게시판이나 홈페이지를 링크시켜서 데이타베이스화 하는 것이다. 바로 지성의 DB화다. 공적으로 창출된 지성을 사적인 창고 속에 가둬놓는 기술적 방법만으로도 엄청난 부가 창출되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것의 존재가 19세기적 산업으로서의 농업, 20세기적 산업으로서의 자동차생산을 없앤 것은 아니다. 산업의 위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보서비스 산업이 산업의 가장 우위에 놓이고, 그 허리에 자동차․조선․철강 등등의 제2차 산업이 온다면, 그 아래에 제1차 산업이 위치할 것이다. 이런 피라미드식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게 오늘날 산업배치의 특징일 것이다. 
새롭게 생겨난 산업 부분의 노동 활동을 다루다 보면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오늘날의 산업은 비물질적 형태의 상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그 생산과정 자체도 비물질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는 거다. 이런 비물질적 노동 활동이 예전의 근력에 의존하는 노동과 결합하여 일종의 착종이 생겨나는 것이다. 소비하고 나면 그 가치가 사라지는 예전의 방식과는 달리 비물질적 노동에 있어서는 그것의 생산물을 소비할 때 그 가치가 더 증대된다. 그렇다면 이건 왜 그런가? 간단하다. 오늘날의 비물질적 노동이 광범위한 사람들의 지적․정서적 협력 속에서 그 가치를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협력을 말할 때, 오늘날의 자본주의 속에 어딘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형태의 존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봐서는 이러한 협력이야말로 이후의 코뮨주의를 이룰 수 있는 물질적 기초의 전지구적 형성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제 중심-주변의 문제를 보자. 당연히 중심-주변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과거와는 다른 형태라는 거다. 예전의 중심-주변 관계는 플레이스place로 조직돼 있었다. place는 리얼리티로서의 장소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스페이스space와 구별된다. 예전의 종속이론가들은 중심-주변의 대립관계를 분석할 때, 제3세계가 제1세계가 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면서 매우 경직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두 세계의 분할선은 많이 달라졌다. 예컨대, 우리가 제1세계라고 불렀던 미국과 같은 곳에서도 제3세계, 제4세계 같은 게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이 분할선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본다. 즉 제2차 산업, 제3차 산업의 발전은 천혜의 자원이 없는 곳, 노동의 발전을 통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지역, 그러니까 아프리카보다는 유럽에서 더 적합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분할선이 인위적이다. 가령, 인종차별이라고 할 때, 흑백의 피부색으로 차별이 발생하는 차원이 아니라 빈부의 차이에 의한 일종의 문화적 인종차별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성차별에서도 그와 유사한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국’이라고 말할 때, 예전의 위계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위계와 분할선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승우 : 자연적으로 주어진 정체성보다는 사이보그적인 경향으로 진행된다는 얘기로 들린다. 이전까지의 구성의 유물론이 아니라 버츄얼리즘 입장에 서서, 그러한 경향으로 지금의 사회가 이행될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 같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그 ‘경향’이라는 것, 다르게는 맹아라는 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당신의 책에서도 인용되는 닉 다이어-위데포드도 「사이버-맑스」에서 비슷한 문제제기를 한다. 즉 우리의 경제가 아무리 포스트포드주의 시스템으로 간다하더라도 일단은 육체노동/물질노동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비물질노동 속에서도 새로운 직업병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들이 긍정적인 경향성 속에서 매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얘기이다. 발전의 과정, 혹은 경향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도 든다.

조정환 : 나는 위데포드가 리얼리즘과 버츄얼리즘의 중도론적 입장을 취하면서 비물질적 노동을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위데포드에 대해 너무 혹독하게 말하는 것일 수 있지만, 철학한다는 것 혹은 학문한다는 것은 그러한 절충과 혼합보다는 어떤 하나의 자기 개념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얼리스트들은 경향조차도 자꾸만 반영론 범주로 가져가곤 하는데, 그것은 나 바깥의 그 무엇을 칭하는 것을 경향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가 포함돼 있는 우리의 삶이자 운동으로 경향이라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노동자가 더 세냐, 자본가가 더 세냐, 라는 식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을 세력화시켜서 구분짓고, 아직은 주류가 아니지만 곧 주류가 될 흐름을 경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경향은 하나의 실천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사회적 노동자, 다중․비물질적 노동․코뮤니스트적 주체성 등은 나의 내면에서 하나의 실재이자 희망이면서 그 양자를 연결하는 파워power가 된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증명돼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리’의 문제다. 그것은 확신의 문제이며, 내 안에서 늘 뛰고 있는 맥박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 식으로 경향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것이 근거없는 맹신은 결코 아니다. 분업적 차원에서의 전지구적 매트릭스 구축에 관한 얘기를 아까 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세계화에 대항하는 다양한 투쟁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사파티스타 운동, 브라질의 땅없는 토지농민들의 투쟁, 남아공의 공동체 운동, 다양하게 실험되고 있는 평의회 운동 등을 보면 투쟁적 힘의 출현이 감각되지 않는가. 리얼리티, 파서블리티, 액츄얼리티, 버츄얼리티를 놓고 보자면, 이것들은 존재의 차원들이다. 이것들은 계속 상호작용한다. 파서블한 게 리얼한 것으로 가고, 버츄얼한 것이 액츄얼한 것으로 가고, 액츄얼 했던 것이 해체되면서 버츄얼의 차원으로 옮겨지는 게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활력들은 이 모든 것들을 계속 왔다갔다한다. 


하승우 : 그러나 노동에 관해 새로운 가치판단을 수립하고 그것으로 길을 낸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 속에서 또 하나의 리얼리티를 생산할 수 있을까 라는 점은 여전히 의문이다. 「아우또노미아」에서 언급하듯이 네그리는 노동에 대한 본질주의적 입장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노동에서 이뤄진 질적 변화가 다른 영역으로 투여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보아도 그렇다. IMF를 겪으면서 많은 생산협동조합이 사라졌는데, 이것은 IMF가 그 절대적인 원인이었다기보다 시장진입의 곤란함 혹은 새로운 시장창출의 실패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대안적인 시장을 형성시키는 게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기도 하다.

조정환 : 1963년 이전의 네그리를 노동주의자로 볼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노동거부론자로 바뀌어서 노동에 대한 네가티브한 관점을 강하게 밀고 나간다. 그런데 1992년에 출간된 저작에서는 ‘디오니소스의 노동’이라는, 노동거부론과는 아주 상이한 견해를 제시해서 그를 따라갔던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나 ‘디오니소스의 노동’을 번역하면서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이후에 계속 공부를 하면서,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보여준 네그리의 전환이 나름대로 복잡한 사유과정을 거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 삶에서 비노동이라고 불렸던 영역들, 가령, 예술이나 사랑, 소비와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노동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 노동과 삶이 거의 일체화되어 삶 전체가 노동으로 포섭돼 들어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제국」에는 ‘자본 외부에 아무 것도 없다’라는 얘기가 나온다. 예전에는 자본 외부에 많은 것들이 있었고 삶의 일부분이 강제노동이었기에, 이 강제노동을 깨뜨리고 삶으로 돌아가자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서, 어떤 식으로든 삶과 노동, 이 양자의 접합 경향은 뚜렷해지고 있다. 따라서 네그리는 노동에 대한 거부보다도 노동 그 자체에 역점을 두는 것, 노동 속에 들어있는 그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는 방식으로 해방을 이루자는 전략적 관점을 선택하게 되었다. 
시장의 문제는, 생산과 소비가 모두 노동의 개념으로 포함되는 오늘날의 특징에 주목해서 바라봐야 한다. 이전에는 생산시장과 소비시장이 어느 정도 분리돼 있었지만, 노동의 사회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생산시장과 소비시장 간의 네트워크 혹은 결합이 더 강해졌고, 이 전체가 노동과정의 두 측면처럼 돼 버렸다. 그래서 아나키즘이나 일부 다른 조류는 자기가치화의 문제를 기존시장으로부터 분리, 해체, 파괴하는 것으로서 사고했다. 가령, 윤구병이 꾸리는 공동체가 그 예이다. 부르주아 시장에 공동체가 생산해낸 상품을 유통시키면서, 옆구리에서 결합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존시장과 분리된 방식으로 운영을 하다보니 봉착하게 된 일정한 한계를 타계하는 방법으로서 ‘옆구리 결합’을 택한 것이다. 여기서 왜 이런 결과 혹은 일종의 모순이 나타나는가. 시장이라고 하는 것은 내면적으로는 인간 생산력의 유통공간이다.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분리되어 나가자마자 전 인류사를 통해서 구축해 놓은 지성적 성과물로부터 결절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인류사가 구축해 놓은 생산력을 대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형성된 시장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생산적 힘들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시대의 필요와 소망에 맞게 전용할 필요가 생겨난다. 테크놀러지의 일정한 가공과 조탁을 통해서 반생태적인 것은 친생태적인 것으로, 반인간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기존시장에 대한 저항의 노력과 이것을 재가공하는 조탁의 노력, 새로움을 창출하는 구성의 노력이 동시에 모색되지 않고서는 지금의 자본주의와 싸워서 이길 수도 없고 대체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실험으로 끝나버릴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공동체의 경험들은 이후 우리의 코뮤니즘적 관계 속에서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우리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자결능력 혹은 자가치유능력이 거의 박탈당해왔는데, 이것들은 꼭 회복해야 할 능력이기 대문이다. 이런 점에서 분리된 공동체가 축적해 온 경험이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의 실험실인 것이지, 그 자체로서 완전한 대안은 될 수 없다고 본다.



하승우 : 제국이란 말에는 두 가지 차원이 포함돼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수평적으로 연결된 역동적인 체계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층위의 체계일 것이다. 이 수평과 층위는 어떻게 접합되는가.

조정환 : 네그리는 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 삼단구조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매끈한 공간’을 이야기한다. 그 정점에 미국이 있다면, 초국적 금융자본의 연합체, 유엔 등의 초국적 정치․군사기관들의 연합체가 그 아래에 있고, 민족국가들의 연합체와 개별국가들이 그 뒤를 잇고, 그 다음에 NGO가 온다. 그 아래에 여러 ‘촉수’를 통해 위의 층위로 흡수당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다중들이 있다. 각각은 아래로부터 재현의 층위, 절합의 층위, 통합의 층위라고 명명된다. 다중의 힘을 흡수하는 흡혈기관이 NGO와 일련의 재현기관들일 것이다. 민족국가도 재현기관에 속한다. 재현기관에 빨려올라간 것들은 이후 차례로 연결되어 종합, 통합의 단계를 거친다. 이런 구조로 제국이라는 것은 구축된다. 이 내부에는 다양한 힘들의 연합체가 있다. 이것들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그러나, 딱딱한 위계의 절차만 밟는 건 아니다. 예전에 영국이나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쟁을 일으킬 때는, 일반적인 공장들을 군수공장으로 전환시키고, 병사를 모집한 다음 훈련 시켜 국경 너머로 내보내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어떤가. 일단 그들은 동원한다. 민족국가연합체를 동원하고 개별국가들에 전비를 부담시킨다. 그리고 미디어 등의 수단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쟁의 일방적 정당성을 퍼뜨린다. 그리고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이 쳐들어가서 점령하고 총독부를 세우고 독식하는 과정이었다면, 지금은 이권을 배분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런 동원의 방식은 설득과 경제적 압박, 모종의 유혹을 통해서 이뤄진다. 북한을 예로 들면, 인권단체를 자극--자금을 지원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해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게 만들고, 세계적으로 그 실상을 퍼뜨리도록 한다.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나라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어느새 군사적 공격의 정당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미국이 전면에 나서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것 같지만, 그 아래의 연합체들 또한 이해관계에 따라 일정 부분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참여한다. 곧 이익들의 네트워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위계라는 커다란 선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내부에는 이런 식의 ‘매끈한 공간’이 형성돼 있다. 


하승우 : ‘핵국가’가 논의되는데,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다. 그리고 이 국가가 시뮬라크럼으로 신비화된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조정환 : 1970년대 후반에 국가론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핵국가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복지국가가 68혁명을 통해서 위기에 부딪히고, 이때 주권을 재구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가 위기국가라면, 다른 하나가 핵국가였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국가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 바로 핵국가다. 제국이 다중을 다스려나가는 방법을 보건대, 군주제, 귀족정, 민주제가 있으며, 여기에 핵과 화폐와 정보라는 세 가지 수단이 사용된다. 이 중에서, 핵은 절대 명령의 힘으로 작동한다. 핵은 현재 인류가 소장하고 있는 무기 중에 지구를 직접 파괴할 수 있는 무기다. 이럴 때, 군사적 방법을 동원하는 혁명은 부차적인 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 핵이 현존하는 형태는 제국이라는 지평 속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핵을 중심으로 주권 및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재편되기 때문이다. 제국으로의 이행이 야기하는 통치형태의 변화에서 시뮬라크르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예전의 국가는 통치국가였다. 국가가 공장의 사장과 감독관처럼 구상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중이나 국민을 의식하면서 그들과의 사이에서 여론과 같은 하나의 가변적인 매개를 만들어 냄으로써 통치한다. 중간 매개, 그러니까 미디어를 통해 대중의 지성과 소망--이것이 미디어의 구성원자이다--을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치명적인 저항을 차단하는 것이다. 자동차 사고시에 터지는 에어백처럼 완충장치를 만들어 놓는다는 뜻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신문과 방송 등의 구체적인 미디어들 및 교사나 목사와 같은 에이전트들이다. 이들이 대중 지성을 현존체체에 적응할 수 있는 형태로 재생산한다. 이때의 여론은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다중 지성이 시뮬레이션화되면서 여론으로 변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다중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만다.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오늘날 민족국가의 재현적 통치방식인 것이다. 오늘날 NGO 활동의 한 흐름을 보면, 상당히 많은 NGO들이 유엔이나 국가에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건 자의와 상관없이 제국을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본래 NGO란 시민들, 즉 다중들의 열망들을 표현해내는 것이지만, 다중들의 부분적인 이익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제국의 통치 마디를 다시 한번 집단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다중을 동참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하승우 : 당신의 입장에서 시민사회가 무엇인지 책에서는 정리가 부족한 것 같고, 시민사회의 열망을 받아 안은 NGO가 결국은 제국의 하위 마디로 변해버린다고 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논란이 예상된다. 그리고 앞서 이론적인 측면에서 시민사회를 얘기했다면, 현실적으로 한국의 시민사회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그게 다중 지성의 시뮬레이션에 불과할지라도 한국 정치에서 여론이 활성화된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조정환 : 철학사 속에서의 시민사회라는 것은 경직된 리얼리티를 칭하고 있지 않았다. 그람시가 시민사회를 얘기하든, 한나 아렌트가 시민사회를 이야기하든 말이다. 어찌 보면 프랑스혁명을 이끌어 갔던 광범위한 민중연합체--프롤레타리아트와 프리pre부르주아지가 결합된--가 귀족과 싸울 때 시민사회의 개념을 동원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을 칭하는 게 시또앵citoyen(시민)이다. 귀족을 물리친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대립 국면으로 넘어가면서 시민이라는 개념 자체는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갖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람시나 아렌트의 경우, 이 시민의 개념을 만회하려는 작업을 진행했다. 네그리가 국가에 포섭된 시민사회라고 말할 때, 처음부터 그람시나 아렌트적인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헤겔을 먼저 겨냥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라고 하는 부분이 국가에 포섭되는 과정을 헤겔 자신이 다 보여준다. 헤겔은 초기에 시민사회의 저항을 얘기하다가 나중에는 국가 법철학자가 되었지 않나. 시민사회가 국가에 포섭됐다고 할 때, 경향적으로 국가라는 것에 대해 대항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는 집합체를 시민사회라고 보는 거다.
사실 네그리가 이야기하는 국가에 포섭된 시민사회는 사회적 노동자 개념으로 설명된다. 공장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존재하던 노동자들은 사회전체에 산포되어 있다. 즉 공장 노동자도 시민으로 존재하고, 화이트칼라도 시민으로 존재한다. 모두들 시민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게 바로 국가에 편입돼 있는 시민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미 이렇게 국가에 다 들어가 버리면 희망도 대안도 없게 된다. 이때 사회적 노동자 속의 잠재력과 경향성을 읽어나가면서 다중의 개념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다중은 리얼리즘적 개념이 아니다. 누가 다중인가, 라는 물음에 리얼리즘적으로 접근해서 ‘공장 노동자가 다중이다’라고 답할 수는 없다. 다중은 국가에 포섭된 시민들로부터 도출된 개념으로서 대안적 힘을 찾으려는 추상적 경향의 방법론을 통한 것이다. 국가에 소속돼 있는 존재라고 하는 측면을 걷어내고 생산하는 힘을 가진 성격을 모아낸 것이 바로 다중이다. 이런 방법은 일종의 기획이자, 경향이며, 버츄얼리티가 될 것이다. 버츄얼리티는 리얼리티의 또 다른 형태일 뿐, 반反리얼리티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에서의 시민과 다중을 접근해 보자. 한국에서의 시민운동은 1990년대 이후 6월 운동의 성과 위에서 성장해 왔다. 그만큼 한국의 시민운동은 신생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성장하는 민중운동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또 그것과 결합해야 하는 과제를 떠 안고 있었다. 실제로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한 이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꾸준히 서로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접합의 특성을 보면 아주 불행한 지점을 갖고 있다. 즉 국가 속에서, 국가를 통한 대장정을 밟아 가려는 방법으로 지향점끼리의 접합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의 접합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중론이라고 하는 개념은 사실상 민중과 시민이라는 범주 속의 ‘리얼리티’를 다 포함하면서 탈주권적인 자기조직화를 추구하는 잠재력을 지칭하는 것인데, 우리의 경우는 자꾸만 주권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하승우 : 국가를 통해서 진행시키는 운동방식에 대해서 완전히 거부하는가, 아니면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방식도 유효하다고 보는가. 

조정환 :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은 국가를 통해서 삶의 변화가 오기도 한다. 가령, 국가보안법 없는 국가나 복지가 잘 된 국가는 분명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국가가 이뤄낼 수 있는 변화의 영역이 일정하게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문제, 혹은 우리의 문제, 혹은 다중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요구와 투쟁에 귀를 기울이거나, 위축되거나, 굴복해서 그런 변화를 야기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자기의 운동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당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매번 다른 유형으로 자기 변신을 이뤄온 것이 당이다. 다중들의 움직임에 적응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중앙집권적인 방식은 어쩔 수 없다. 그 안에는 매우 건축학적이고 물리학적 사고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식의 대중조직의 투쟁이 뭔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격적인 변화 혹은 진정한 의미의 변화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당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당운동의 한계를 계속 비판하고, 당과 국가의 접합을 비판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당이 다중과의 결합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국가나 주권체와의 분리를 긴장감있게 의식할 때만 그 가능성을 약간이나마 실현할 수 있을 거다. 그런 식의 일깨움을 통해서 다중들의 자기해방을 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게 지금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승우 : 브라질의 노동자당 페떼(PT)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개인적으로는 룰라가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참여예산제와 같은 것들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한편에서는 국가와 주권적인 결합을 한 것이겠지만,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 즉 다중일 수도 있는 사람들을 주체화시켜내고 있는 것 아닌가.

조정환 : 공공성, 즉 퍼블릭 혹은 민중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대안적 노력들이 어떻게 표현돼 왔는가 하면, 대부분 국가를 매개로 해서 공공성을 실현하는 방법을 추구해 왔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적인 것을 넘어서는 공적인 것의 가능성을 국가가 독점해 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퍼블릭 혹은 공공성과는 다른 원리를 사고해야할 시점에 직면해 있다. 그게 나는 common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성이라기보다는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방식을 말하는 것인가. 가령, A와 B가 관계를 맺는다고 치자. 우리는 여기서 양자 사이에 초월적인 제3자를 만들지 않는 방식, 즉 공통의 관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페떼의 경우, 중앙집권적이긴 하지만, 아래로부터 노동자들을 조직해 왔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주 강하게 자리잡았던 역사적으로 드문 사례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룰라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신자유주의와의 타협이 있었다. 이전 정권이 겪었던 문제를 룰라 역시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으며, 공약과는 달리 무토지농민운동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 이들의 통치원리 중의 하나가 바로 ‘참여’인데, 공공적인 것이냐, 공통적인 것이냐의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자면, 참여는 공통적인 것이라기보다 공공적인 것이다. 어떤 제3의 통치정책을 끌어냄에 있어서 수많은 개인들의 참여가 가능한 통로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는 거다.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폭넓어지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것이 양자 사이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원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참여’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공동체가 아니라 공통체의 구축이라는 맥락 속으로 참여라는 말을 끌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페떼가 일정한 기여를 할 수도 있으며, 우리와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겠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통치행위 그 자체를 우리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하승우 : 페떼의 얘기를 꺼낸 것은 참여예산제와 같은 제도 때문이었다. 주민들이 직접 예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계획에서부터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참여가 가능하게끔 만들었다. 여기에 주목하는 것은, 참여를 통해 주민들이 행정적인 명령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칠 결정들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로, 존엄한 존재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당이 국가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예는 아래로 향하는 당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볼 때, 권력과 활력의 문제를 구분하면서 국가주의에 접근하는 당신의 시선이 경직된 이분법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현실에서는 새로운 접합들이 실질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또, 아렌트의 경우 권력을 힘과 구분하면서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 않나.

조정환 : 권력과 활력의 부분은 나의 정치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유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활력과 완전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활력의 권력되기’가 없으면 부르주아 사회가 자기를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노동의 자본되기’가 없으면 자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매일매일 노동자가 출근을 함으로써 자신의 근력이나 지성을 자본에게 줌으로써만 자본은 재생산된다. 재생산된 자본은 더 큰 자본이 되어 더 큰 강제를 하게 된다. 그게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여기서, 맑스가 자본을 ‘죽은 노동’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 또한 ‘죽은 활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활력이 물화된 특정한 형태가 권력이다.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활력은 결코 권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함과 존엄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참여예산제를 보자면, 이렇다. 권력으로 되어가는 구조 속에서, 이 활력은 자기 생명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늘 억제된다. 활력의 권력되기 과정은 기껏해야, 불복종이나 탈주의 힘으로서만 활력을 존재하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참여예산제에서 권력과 활력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주민의 활력이 주민의 것이 되는 성과를 지속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권력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예컨대, 복지사회가 한 사회의 중앙에 구축해 놓았던 시스템을 주민자치영역으로 하강켰다고 볼 수 있다. 또 정치경제학적으로 다시 설명하자면, 예산이라는 것은 한 사회의 잉여가치다. 세금이나 기타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의 수중에 집중되었다가 자치영역으로 하강․배분되는 방식으로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거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것의 주체가 관리였다면 이제는 주민이 된 것이다. 이것은 분명 진일보한 형식이다. 주민들이 주체로서 누리는 시간이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투표를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이 이제는 그런 권리를 갖게 된 것과 같은 유사한 정도의 진보다. 그리고 예산 역시 우리가 만들어 낸 재산이다. 이것이 나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나의 근처로 왔다고 해도, 국가의 것으로서 나에게 온 것이다. 국가가 베풀어주는 시혜로서 온 이 예산은, ‘나의 것’임을 곧바로 알 수 있는 ‘나의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은 결국 누가 이 예산의 더 큰 몫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갈등을 야기할 지도 모른다.


하승우 : 네그리 이론 속에서 변증법은 부정된다. 단순한 접목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생산하기 때문에, 곧 단순한 정반합의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비변증법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조정환 : 사회적 노동자 얘기할 때와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변증법에도 다양한 조류가 있어서 단순화시켜서 말하기가 곤란하다. 어쨌든, 아까 말한 의미에서 변증법은 차이들을 관리하는 종합의 방식이다. 차이들을 공통되게 흐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3의 지점에서 차이들을 관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네그리가 이 변증법을 부정했다고 말하면 어폐가 있다. 네그리는 변증법의 방법이 자본의 방법이며 디오니소스 노동의 방법은 변증법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곧 네그리는 변증법의 실재성을 인정한다. 부르주아 사회전체는 변증법적으로 움직이며, 제국이 또 변증법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활력을 권력으로 만들고, 탈주권적인 존재를 주권적인 존재로 전환시켜 나가는 것이 현대의 사회운영방법이자, 사유의 방법이다.


하승우 : 마지막으로, 제국은 언제쯤 붕괴할까.

조정환 : 제국은 늘 붕괴하고 있다. 제국의 특징은 자기 붕괴를 자기의 먹이로 삼는 역사상의 특이한 지배형태다. 「제국」의 마지막 부분에 부패에 관한 얘기가 등장한다. 위기를 통해서 살아나가는 존재로서의 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다. 제국은 늘 붕괴하고 있지만, 그것은 제국의 자기붕괴가 아니다. 제국으로부터 분리하면서 우리의 삶을 우리가 회복하는 운동 속에서만 제국은 진정으로 늘 붕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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