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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딸려!> 서평 - 이원형

마이노리티시선 조회 수 2088 추천 수 0 2003.11.25 12:08:18
근대화 경제발전의 쇠수레바퀴 아래서  

구로노동자문학회 10주년 기념 시집 {왜 딸려!} 시평

근대화 경제발전의 쇠수레바퀴 아래서


이원영(정치철학연구가)


'아이 엠 에프 폭풍'에 무너진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가 여기저기 요란한 가운데, 노동자들이 '한칼에 목 짤린 채/ 코 묻은 돈과 조카 돌반지까지 저당잡힌'([자화상, 1988]) 오늘, 우리는 이 '시집'을 읽는다. 이 시집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언어적 기교나, 대우나 현대에서 나온 신상품처럼 새로운 모던한 형식 실험들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이 시집에서, 투쟁하는 대공장 노동자들의 집단적 형상과 같은 구래의 노동문학론이 요구하는 새로운 '리얼리즘적 전형들'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아마 실망할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민족문학론이 요구하는 세계관적 요구나 창작적 기율들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민족문학(론)의 위기' 상황에 어떤 돌파구를 뚫어줄 전진적 성과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상당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이 시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정경규의 [짧은 시 1]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너, 시를 쓰느냐

잔업 철야 끝내고 돌아와 코피 흘리며

열 일곱 네 슬픈 생애의 비망록을 적느냐


시 아닌 시. '잔업 철야 끝내고 돌아와 코피 흘리며' 쓰는 생의 비망록, 그것은 처절한 삶의 기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시집에서 느껴지는 공감들, 때로는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감화력을 이 비망록같은 기록의 힘을 떠나서 과연 이해할 수 있을 것일까?

이쯤에서 내심 '기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기록만으로는 삶의 표면만을 포복하는 자연주의/사실주의로 전락하며 '사실'을 넘어서는 어떤 진리의 차원, 본질의 차원에 미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만약 그것이 주체가 빠져버린 취재기자식 기록이라면 기록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대한 요구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집의 시들은 삶의 굴곡들, 접힘들을 지워버리고 평면화해 버리는 사물적 기록 이상이다. 그것이 삶의 비망록인 한에서,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본에 흡수되어 버린 죽은 세계에 대한 묘사에 그칠 수 없다. 삶, 생명이 자본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짓눌리고 훼손당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접히고 굴곡지는지, 온갖 굴절들 속에서도 살아 꿈틀거리는 삶의 에네르기를 자유롭게 할 길이 무엇인지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이들은 살아 나가면서 기록하고 기록하면서 묻는다. 추구와 발견이 기록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것들은 기록적 발견 혹은 발견적 기록이다.


근대화의 뒤안길

우리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지난 한 세대 동안 전 속력으로 내달려 '한강의 기적'을 거쳐 '아시아의 용'에 이르는 숨가쁜 근대화 경제발전의 뒤안길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영광의 시간들이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공간의 박탈

박정희식 근대화의 진열창이었던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대부분 농민의 딸아들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정주했던 농촌 마을을 떠나와 '서울 구로동 토굴 같은 달셋방'([내력])을 정처없이 전전하면서 도시의 유목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농촌을 떠나 서울을 향할 때의 기대는 이런 것이었다: '그저 좋았습니다 그땐/ 서울행 기차를 타고/ 꿈이 얼얼이 섞인 이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절반은 다 된 거나 다름없었지요'([희망]). 그러나 식당과 호프집 종업원, 공사장 잡부, 용접공, 여관뽀이, 철공장과 봉제공장 시다, 신문 배달부, 화물차 조수, 지하철 운전기사 등등을 전전하며 그들이 다음날의 노동을 위해 밤마다 들어가는 곳은 '삼백에 팔만원짜리 반지하 셋방/ 보일러 가스에 목젖이 따끔거렸고/ 장판 밑을 스물스물 습기가 올라왔다/ 쥐며느리, 귀뚜라미, 거미, 바퀴벌레, 개미 심지어 맹꽁이까지 농장을 이루었다'([집들이])고 묘사되는 곳이다. 63빌딩과 같은 근대적 공간과 롯데월드와 같은 탈근대적 공간이 중심을 차지한 도시에서 '밤으론 찬바람 창틈으로 불어지고/ 문풍지도 덩달아 서러워 울어대는/ 달동네 꼬방동네 단칸방'([관악산 언저리에 나는 살으오])은 전근대적 공간인가 근대적 공간인가 탈근대적 공간인가?


노동의 고통

80년대 말에 쓰여진 한 시는 '우리에겐 무쇠와 같이 튼튼한 팔이 있다/ 허연 피부를 드러내며 장신구를 원하는 팔이 아니다/ 장시간 노동에도 지칠 줄 모르며/ 모진 세상 모진 삶을 억센 손아귀의 힘으로/ 끊임없이 노동하여/ 우리들의 억눌린 땅을 일구어 내고야 말/ 살아 있는 힘이 우리에겐 얼마든지 있다'([우리들의 땅])고 노래했다. 노동에 대한 자부심은 80년대의 노동운동을 지배한 정신이다. 노동해방이 노동자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표상되면서 해방은 '끊임없는 노동'을 통해 달성될 것으로 사고되고 노동은 거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만인이 공유해야할 것으로 주장되었다. 노동자들의 힘은 노동 외부에서보다는 노동 내부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관념적 자부심의 이면에서 노동의 견딜 수 없는 고됨이 끊임없이 호소되고 있었다.

[어떤 이별]이 그려내듯, '공사장 잡부와 용접공과 여관뽀이와 철공장 시다와 신문 배달부와 화물차 조수로 안개 속을 배회하던 그'는 병실에 누워서야 비로소 평온한 얼굴을 보인다. 시내버스 안내양이었던 누님은 시골집에 돌아와 잠을 자면서도 '오라이 스톱, 오라이 스톱/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한다'([오래된 시계]). 지하철 운전기사는 '하루 20시간을/ 끝도 없는/ 2호선 원형 싸이클을 돌다가' '축 처진 어깨 늘어뜨리며/ 매연 사이로 웬 별 하나 바라보며 입고한다'([용답동 182번지]). 임금 노동 속에서 노동자들은, '공장만 벗어나면/ 집만 나서면/ 써먹을 데라곤 없는/ 그러나 내 기계 앞에서만은/ 늘 강자이고 싶은/ 50만원짜리 몸뚱이'([무너지는 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시간은 기계의 시간에 어떻게 단단히 붙들리는가? 그것은, 반쯤 풀린 퀭한 눈으로, '규칙적인 기계음에/ 보조를 맞추느라/ 그보다 몇 배로 분주한/ 라인 구석구석 몸놀림들'([무너지는 밤])로 나타난다. 귀 뒤에서 '왜 딸려!'라고 명령하는 관리자들은 노동자의 삶을 기계의 시간에 예속시키는 집행인들이다.


출근하기 무섭게 다리미를 잡으면

그때부터 듣게 되는

왜 딸려!

그 수없는 소리

하루 내내 버티어 서서

미싱사에게 일감을 대어주다 보면

귀가 앵앵거리도록 듣는

왜 딸려! 왜 딸리는 거야!

처음 몇 달간은 꿈속에서도

그 소릴 들었다([왜 딸려!])


[봉숭아 하나 2]에서 그려지는 공장은 감옥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콘크리트 작업장

갓이 까맣게 타들어간 침침한 형광등만 깜박거려요

찬바람이 부나요

담장 아래 키 작은 봉숭아는 어찌 되었나요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담장

그 위에 비수처럼 박힌 유리조각

키작은 봉숭아는 아직 그 아래 서있나요

담장보다 더 높은 굴뚝

그 굴뚝이 토혈처럼 쏟아내는 까만 연기

키 작은 봉숭아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나요

꽃씨 하나 담지 못해

끝내 터트리지 못하고 떨어져버린 씨주머니 하나

아직도 밋밋한 내 가슴 같았어요


또 공장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무덤으로도 형상화된다.


찬바람이 그쳤나요

깜박깜박 시들어가는 형광등 주위로 몰려든 빠우가루

하루살이 주검처럼 작업대 위로 수북이 떨어져 죽어요


감옥 혹은 무덤과 겹쳐진 곳으로서의 공장에서, 노동은 육체의 부식을 가속화하는 약물들 없이는 계속될 수 없는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에 다름 아니다.


아이나

가슴이 답답해요

마이 엠프톨

피기침이 쏟아질 것 같아요

리팜핀

다리가 후들려요

염산 피리독신

자꾸 눈이 감겨요

첫서리가 내렸나요

별이 졌나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실과 신뢰하나로/ 이 나라 경제를 이끌어온 우리들'([너의 몰락]) 혹은 '우리에겐 무쇠와 같이 튼튼한 다리가 있다/ .../장시간 걷는 걸음에도 지칠 줄 모르며/ 끊임없이 노동하며/ 우리들의 서러운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다'([우리들의 땅])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생각은 노동자를 기만하는 자본의 달콤한 덕담의 메아리거나 노동의 힘에 대한 환상적 표상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젠 매 초 매 분/ 생명을 걸고 노동해야 하는가/ 매일 유서를 품속 깊이 간직한 채/ 절망적으로 노동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동지여/ 우리의 목숨은 붙어 있어도 죽은 목숨이구나/ 푼돈을 대가로 포탄 속에 온몸 내놓은 파리목숨이구나'([어느 노동자의 죽음을 생각하며])는 자각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의 힘이 경제발전의 주체라는 허구적 자기확인에서 찾아지기보다, 경제발전의 과정 속에서, 삶의 다양성의 노동으로의 환원을 통해, 자본에게 빼앗긴 삶의 풍부한 힘을 회복하는 것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회적 소외

강제된 노동 혹은 노동에서의 소외는 노동자들의 삶의 사회적 영역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그리고 있는 첫 번째 문제는 저임금이다. [월급 받는 날]은 저임금이 노동자들의 소박한 삶의 꿈을 어떻게 산산조각 내는지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번 달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스토랑에서 돈까스 좀 원없이

먹어보자고 월급 받는 날을

벼르던 스무살 인순이


항상 허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다는 시골 어머니께

영양제하고 좋은 안경 사줘야겠다고

몇 달 전부터 얘기해 오던

명희도

월급 30만원에서

시집 밑천으로 20만원 적금 붓고

나머지 10만원에서

계절이 추워오니 싸구려 털잠바에

구두도 하나 장만해야겠고

스킨로숀도 제일 싼 걸로 적고


밤이 늦도록

벌써 몇 장째

한달 쓸 용돈을 이리 짜보고 저리 짜보더니

달랑 손에 남은 4만원

이번 달에는 연탄도 아껴 아껴써야 할려나 보다고 울상이다.


그렇게 가보고 싶은 산도

동해도

유원지도

우리들의 쉼터가 되어주지 못한다


이십대의 화창한 나이에

잔업으로 생기 잃은 얼굴로

오늘 내일 하루 하루 보내며

기다리는 건

월급 받는 날


30일 일해주고 받는 월급봉투의

기쁨은 아주 잠시

몇 년 후의 몇 십년 후의 내 모습은

잔업에 야근에 지쳐 보이지도 않아

그나마 가질 수 있는 소망은

힘들게 적금 부은 것으로

잘 사는 남편감 골라 시집가는 그 날을 꿈꾸는 것


이처럼 저임금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 공장 노동에서 벗어나 쉬고 싶은 욕구 등 좀더 나은 삶에 대한 일체의 욕구들을 자제하도록 강제하며 어머니를 돌보고 싶은 인간적 욕구마저 좌절시키고 심지어는 가장 기초적인 생존 수단들마저 절약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다. 슈퍼마켓의 '우측 하단 마대를 가득 메운 라면들' 중에서 '한참 망설이다 제일 값싼 안성탕면'([라면먹기])을 사서 먹지만 슈퍼집 외상 장부 에는 외상(부채)만 들어간다.


단칸 셋방 부엌창을 열고

빗소리를 듣다

아욱, 아욱국이 먹고 싶어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또 하루치의 일기를 쓴다

오늘은 700원 어치의 아욱과

500원 어치의 갱조개

매운매운 300원 어치의 마늘맛이었다고 쓴다

서러운 날이면

혼자 한솥 가득 밥을 짓는다고 쓰고

외로운 날이면

한 양푼의 돼지고기를 볶는다고 쓴다

시다 삼기가 '신라면 두 개'라고 써둔

앞장에 쓰고

공업사 직공들 '소주 두 병에 참치캔 하나'였다고 쓴

앞장에 쓴다


자본에게서 부채가 미래의 착취를 담보로 한 것이라면 노동자들에게서 부채는 미래의 노동을 담보로 한 것이다. 부채가 갚아져야 할 것인 한에서 누적된 부채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다음날도 계속해서 노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또 하나의 압박으로 작용한다.

이런 삶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시집 전체에 절망의 분위기가 깊이 깔려져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극히 자연스럽다. 굴렁쇠처럼 쓰러지지 않고 달려온 먼 길이지만 삶은 '고향 실개천처럼 말라버려' 고독하기만 하다([자화상, 1988]). '우리는... 언젠가는 자본의 오랏줄에 매달려 두 발 힘없이 늘어질 사형수'([어느 노동자의 죽음을 생각하며])에 지나지 않는다. '새들은 내 삶에서 다 떠났다'([희망에 대하여])는 절망의 느낌은 [아우에서]는 가족 전체의 절망의 감정, 그리고 '그러니까 아직은/ 아무 것도/ 없어 없어 없어'라는 총체적 허무의 느낌으로 확대되어 표현된다.


아우야

군대 마치고도

당당하게 돌아오지 못하고

휴가 다녀오듯

시골 부모님께 한 번 들르고

서울 형들 한 번씩 찾아보고

그 길로 다시 군대가듯

외항선 타고

남미까지 갔다온 아우야


제주도에 조랑말 치러 간다더니

부산에서 뭔가 큰 일 한다더니

그건 다 거짓말이었고

뱃사람 되기 위한 수작이었고

거짓말처럼 뱃사람 되어 나타난 아우야


소문대로 죽을 고비가 많더냐

소문대로 돈벌이가 되더냐

그렇겠지

거기도 사람 사는 데니까


법보다 주먹으로 다스린다는 얘기

여차하면 물귀신 된다는 얘기

일하지 않는 자의 몫이 더 크다는 얘기

그렇겠지

거기도 죽기 아니면 살기니까


자꾸 안부를 묻는 아우야

9남매 중 막내야

없어

네가 목숨을 걸고 잡아 올린

푸르고 싱싱한

힘 좋은 생선 같은 얘기는

없어


공단에 있는 동생 경숙이의 철없는 수다도

자꾸만 굳어 가는 어머니의 다리가

좋아졌다는 소식도

노가다판에서 술병으로 휘청거리는

큰형의 한 번만이라도 보기 좋은 웃음도

없어


죽기 아니면 살기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아무 것도

없어 없어 없어


탈주의 꿈들

시집 전체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잠과 죽음은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도피처이자 안식처이다. 타이밍으로 오는 잠을 쫓으며 잔업과 철야를 마친 노동자들은 '꿀잠'에 빠져 든다. 죽음 속에서 비로소 평온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친 노동자들은 잠 속에서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고 고요를 맛볼 수 있다.

잠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또 하나는 그것이 꿈꿀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전쟁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공장에서 노동을 시작하기 전 농촌 삶에 대한 꿈이다.


숙아

너도 졸고 있구나

화학본드 냄새에 역겨운 기색도 없이

견뎌오다

언제부터인지 시들어 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너는 바다를 잊지 못해

새벽 세 시 쉬는 짬에는

짧은 단잠 속에서나마

군산 앞바다 드푸른 바닷소리를

듣는다고. 그래

때때로 내 귀에도

그 소리 들린다

사철 푸른 대숲에 잉잉대는

허기진 뱃고동소리.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내달리는 뻘밭

갈매기 쫓아, 그래

나도 내어달린다

이 꿀 같은 잠 속에서나마

나는 더러더러 고향집에 내려가보곤

뒷산 언저리에 진달래 뿌리가

붉어지는 것도 보고

흙담 아래 삼동추 잎이 돋아난 것까지도

보고 온다

미처 담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깨는 잠

더 이상 경직된

신호음으로 깨울 수 없는

우리들의 잠.([야근일지 1])


고향과 어머니. 이 두 개의 이미지는 항상 따뜻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공단의 노동자들에게 단순한 과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재이며 미래이다. 고향은 '뒷 산 언저리의 진달래', '흙담 아래 삼동추'같은 평화의 이미지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이 물러섬 없이 버틸 수 있는 저력의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결의대회를 마치고

공단로 따라

우리는 어깨를 걸었다

서녘 하늘 움추린 노을이

확 터져 나오고

노래를 불렀다

벗이여

그리운 이름을 불렀다

작업화 발자국 쾅쾅 구르며

총구는 보이는가


무차별 최루탄을 뚫고

한 걸음 내딛다 쓰러진 곳

고향집 울타리 기어오르던

비틀비틀 기어오르던

녹슨 철조망에 붉은 나팔꽃([행진])


고향집 울타리를 기어오르던 붉은 나팔꽃. 그 평화의 꽃은 어느새 불굴의 저항의 깃발로 전환된다. 이처럼 고향은 '습한 방바닥에 엎드려 서해의 간이 배인 고향 마을을 떠올리고 갈대밭 갈대처럼 흔들리며 소리 죽여'([내력]) 울게 되는 감상과 향수의 시공간에 그치지 않고 강제 노동의 반인간적 현실을 거부하는 평화의 이정표이자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에네르기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고향의 이미지로 뭉뚱그려지곤 하는 '지나간 미래'의 핵심에는 어머니가 놓여 있다. [오래된 시계]에서 어머니는 서울로 가 버스 안내양을 하던 누님이 설날에 집에 내려와 '빛바랜 가족사진이 걸린 웃방 봉창벽'에 걸어 놓았던, 그러나 이제 이십년이 지나 고장나 버린 그 오래된 벽시계를 정성스레 닦는다. 어머니의 이 정성스런 손길은 농촌과 도시를, 농민과 노동자를 깊숙이 연결시키는 힘으로 나타난다. 도시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 사랑의 힘 때문이다. [김하러 가신 어머니] 연작은 그렇게 길지 않은 형식 속에서 이 어머니의 사랑을 서사적 이미지로 그려낸다. '여자몸으로 남자일까지 해낸 홀어미'는 울며 지은 농사 헛고생만 하고 '섬 건너 김공장에 나가신다'. 한 해 고생이 제 자리걸음만 시키지만 어머니는 잠든 딸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새벽길을 나선다. 일이 늦어져 황혼녘에 어머니가 다리에 당도했을 때에는 밀물이 밀려오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은 건너지 말라고 만류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이 보고 싶은 마음에 밀물이 밀려오는 다리로 들어선다. 다리의 중간을 넘어 물은 점점 차오르고 어둠마저 짙어 이젠 돌아갈 수조차 없는 상황.


나를 도울 사람 하늘 아래 이 바다 위에 아무도 없다

조심스런 발 떨리는 한 발에

물살이 휘감아 당긴다

한 걸음 헛디디면 끝장이다. 어린 딸이 기다리는데


죽음을 넘어선 다리 끝에서

다시 살아나는 다리 끝에서

무너지는 긴장 속에 마지막 걸음을 떼는데

식은땀을 겨울 찬바람이 스친다


그 순간에도 버릴 수 없던 김 한 보자기

고맙게 들고, 어머니

어둠을 헤쳐 가시는데

김만을 좋아라 할 철없는 딸이

어서 보고 싶다


마지막 연에 나타난 시적 화자의 흔들림이 감상을 방해하지만 창출된 상황 그 자체의 힘 앞에서 그것은 작은 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녀의 딸아들들에게 어떻게 계승될까? 그것은 '살 떼어 주고 싶은' 벗들에 대한 사랑으로([가리봉, 아름다운]), '모오든 것들의 맨 밑바닥에서/ 드러내지 않는 우직함으로/ 묵묵히 뛰어주는'([발을 닦자]) 발과 같은 사랑의 염원 혹은 욕구로 나타난다.

고향의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두 번째의 요소는 자연이다. 자연에 대한 그리움은 자본에 의해 영토화된 노동자들의 생활에서 탈영토화의 지향성으로 출현한다. [난]의 '그녀'는 '출근 시간에 붸기면서도/ 화분에 물을 주고/ 햇빛이 잘 들도록 창문을 열어 놓'는다. 또한 노동자들은 자연에서 '너와 나를 불지르는' 풍부한 상상력을 획득하기도 한다.


저기 저 산

푸른 하늘 아래

왼종일 와르르 와르르

비탈을 굴러

온몸을 태워

너와 나를 불지르는

용접불꽃 같이 눈부신

이 땅의 이 큰 그리움과 사랑([단풍])


어머니와 자연을 품은 고향이 노동자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만큼 고향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현대 문명은 증오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서울 것들'로 상징되는 돈과 현대 문명 사이에 적대의 선이 그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밀려오는

관광객의 인파 속에

세상 온갖 잡동사니 함께 들어와

너와 나의 삶이 흩어질 때

어머님은 좋은 세상 온다며

행주치마로 눈물 닦으시고

아버님은 쇠스랑 든 채

헛웃음 웃으시더니

형광등 하나에 농협부채 늘고

전화 한 대에 수협부채 늘고

냉장고 한 대에 농협 차압이

가스렌지 하나에 수협 차압이

미역 양식으로 이자 때우고

김 양식으로 민생고 해결

서울 것들 때문에 바다는 병들고

자가용 때문에 땅은 잘리어도

목숨 바쳐 지켜온 땅이기에

죽어도 떠나지 못한다며

오늘 새벽도 아버님은 바다로 가신다.([터전])


온갖 부채와 차압, 자연파괴, 가족들의 이산 등에 시달리면서 죽어도 떠나지 못할 목숨 바쳐 지켜온 땅. 이 적대의 현장에서 어떻게 아버님이 든 쇠스랑이 예사롭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시집에 탈주의 이미지들로 등장하는 '고향', '자연', '어머니' 등의 토속적 이미지들의 미학-정치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따로 살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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