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민주주의

예술인간의 탄생

인지자본주의

아우또노미아

위험한 언어

동물혼

몸의 증언

자본과 정동

자본과 언어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비로소 웃다

아내의 시

리듬분석

봉기

노동하는 영혼

과학의 새로운 정치사회학을 향하여

혁명의 영점

캘리번과 마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선언

다중과 제국

네그리의 제국 강의

탈정치의 정치학

옥상의 정치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

텔레코뮤니스트 선언

매혹의 음색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

공산주의의 현실성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자립기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제국의 게임

산촌

생이 너무나 즐거운 까닭

빚의 마법

9월, 도쿄의 거리에서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정동 이론

정동의 힘

마이너리티 코뮌

대테러전쟁 주식회사

크레디토크라시

예술로서의 삶

가상계

가상과 사건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

잉여로서의 생명

로지스틱스

기린은 왜 목이 길까?

집안의 노동자

사건의 정치

기호와 기계

부채 통치

정치 실험

일상생활의 혁명

깊이 읽는 베르그송

지금 만드는 책

예술적 다중의 중얼거림

Pourparlers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서평  

존 홀러웨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조정환 외 옮김, 갈무리(2002)




Lewis Hine
Powerhouse Mechanic
1920




책의 제목만 놓고 봤을 때, 우리는 권력에 의해 바뀐, 바뀌어 가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어떠한 이념을 내세우건 권력은 세상을 바꿨고 우리는 그 권력에 숨막혀 하거나 그 권력에 경도되어 있거나 그 권력의 자장 안에서만 사고하고 뭔가를 수정하거나 재고하려는 습관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속에서 우리가 권력을 잊으려 하거나 고개를 돌려 외면해도 권력의 균질성은 마치 손오공의 부처님 손바닥처럼 우리가 걷거나 달리거나 날아온 그 먼 장소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러한 균질성의 확대는 내가 한국에서의 노동을 거부한 채 다른 삶을 위해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이동해도 내가 노동을 거부했다는 것이 마치 범죄의 한 형태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비밀경찰을 급파한다. 어느새 기존의 코드들의 그물이 나를 덮친다. 나는 다시 체포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다시금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적 관계들의 자본주의적 구성은 본질적으로 지구적이(154쪽)>기 때문이다. 이 전지구적 자본 내에서의 행위는 곧 노동 그 자체만을 의미한다. 즉 노동에 반하는 행위는 행위결과와 분리되면 보면 행위가 아니다.
지난 세기의 자본이 국가가 국가를 강간하는 폭력적 식민주의 등을 통해 그 세력과 영역을 확장, 정복했다면 이 세기의 자본은 굳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계몽하지 않고도 자본을 극대화 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인형들은 때리거나 태엽을 감아줘야 노동에 임했지만, 이제는 리모콘의 손쉬운 동작에 의해 스스로 알아서 노동하는 자동인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 리모콘을 조정하는 권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 당, 혁명담론, 노동자 조합, 기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들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지난 날 좌파는 기존의 자본의 권력을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으로 바꾸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경주했다. 그 방법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루카치 마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피해갈 수 없는 당이었고, 일면적 공산주의 국가의 축조였으며, 급진적이고 획일적인 동질성의 이론이었으며 무엇보다 계급적대였다. 이것이야말로 각각의 혁명운동의 정통성을 내세우는데 하나의 구심점에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진정한(?) 코뮨주의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던 것만 같다. 만약 스탈린의 러시아, 김일성의 북한의 코뮨주의도 코뮨주의의 한 방법이고 한 양상이라면 우리는 이제 코뮨주의의 이름을 포기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름을 포기하거나 그렇지 않아야 하는 문제와 그 궤를 달리 한다. 이 책 안에서, 어쩌면 이 책의 핵심주장과 다소 부적절해 보이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인용문은 문제의 일단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소외는, 그것이 측정될 수 있는 그것의 대립물, 가능한 자기자신에로의-생성, 자기 자신과-함께-있음과 같은 어떤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일 수조차 없으며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훔치고 세계로부터 그것의 영혼을 빼앗는다고 비난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코뮨주의 운동사에서 노동자의 소외를 측정할 수 있는 대립물, 즉 그 척도는 당에 의한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의 소외를 가져오는 자본의 권력의 대척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이다. 그것은 착취의 생산력을 노동자 스스로의 생산력으로, 권력을 이양함으로서 쟁취해 나가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의해 소외는 소외일 수가 있었고 착취에 대한 계급적대로 이해될 수 있었다. 즉 하나의 척도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본의 권력에 상상적으로나마 대칭적인 권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당이나 국가를 통하지 않고도 충분히 소외는 그 소외 내부에 그것의 대립물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와 자본의 대립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부에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늘, 그들의 작업장이 폐쇄되거나 또는 실직당해야 한다고 시장(市場)이 명령하는 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상파울로의 가게 주인들은 늘,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거리의 아이들의 살해를 조장한다. 우리는 늘 우리의 자전거들, 자동차들 또는 집들을 잠근다. 서로 관계하는 형태로서의 가치는 쟁점이 되고 있고 끊임없는 투쟁의 대상이 되며 끊임없이 파열되고 재구성되며 다시 파열되는 과정 속에 있다(145쪽)> 이러한 양태를 두고 저자는 ‘경화된 물신주의’와 ‘과정으로서의 물신화’라고 구분해 명명한다. 여기서의 물신주의는 환원적이다. 우리는 자본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본에 귀속된다. 물론 이는 물신주의가 기정의 사실임을 인정할 때 더 나아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환원적 물신주의의 물신화가 노동자 스스로 물신화를 지양하거나 반대로 추구해나가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소외에 대한 분노와 부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적절한 대립물을 쌓아가는 운동이 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코뮨주의를 향한 외적 관계가 아닌 내적 관계의 투쟁을 유효화하려고 할 때마다 정말 작업장에서 우리가 느끼는 순간 순간의 분노가 자본의 물신주의를 격파해 나가는 실천적인 기제로 작용할 수 있을지 쉽게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 내적 분노가 외적 실천으로 마치 조건반사처럼 이어진다면 아마 오늘의 자본주의는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왜 그런가.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지만, 우리의 임금 노동은 더러워도 무서워도 먹고살기 위해선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위가 추상적 노동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화폐는 존재할 수 없다(182쪽)>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추상적 노동을 구체적 노동으로 전화할 수 있다면 화폐에, 즉 자본의 균열이 날 것인가. 아니, 구체적 노동이라는 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이것의 난점은 자본과 구체적 노동은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만약 작업장 내에서 누군가 긍정적인 사고로 생산에 임한다면 자본가는 그를 칭찬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성실, 근면할수록, 그는 스스로 추상적 노동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그가 언젠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단지 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구체적 노동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적 노동은 자본가의 공장 안에선 결코 이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그는 이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다시금 추상적 노동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내적 파열과 재생산의 환원구조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우리의 ‘왜’속에 함축되어있는 투쟁이 한계를 갖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대학 내에서 더 나은 조건들을 위해 투쟁하지만 그 기관의 실존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나은 주거를 위해 투쟁하지만 그 기관의 실존을 문제삼지 않는다. 우리의 투쟁은 ‘그것이-만사가-존재하는-방식이다’식의 수용된 틀 내에서 일어난 다. 우리는 이 틀이 우리가 성취할 수 있을지 모르는 어떤 것을 제한하거나 부분적으로는 무효화시킴을 알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결과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것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동일성의 경계들을 받아들이며,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 경계들을 다시 강화한다(172쪽)> 다시 작업장으로 되돌아 가보자. 우리는 조금 전에 대립물로서의 물신주의의 물신화가 자본에 대립물일 수는 있지만 우리의 의식과 행위를 전환하기에는 미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저자가 비판하는 계급투쟁이 행위와 행위결과의 구분법에 의해 자본에 대립할 수 있다는 기존의 인식을 참고해도 그렇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본을 지양할 때의 행위는 어떤 결과로 환원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행위는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 내에서 우리의 행위가 노동, 즉 잉여가치를 생산을 일련의 활동에 국한되어 행위결과가 화폐로 뒤바뀐다면,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행위는 부정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순진한 도식이 아닐까. 저자는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에 비춰 우리의 행위가 언제나 부정적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남의 돈을 벌어먹는데 즐겁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어먹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의 기계적 장치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부정의 물신화, 부정의 소외화, 부정의 주체화의 담지자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회에 대한 비판은 동시에 우리자신에 대한 비판이어야 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동시에, 자본주의에 맞설 뿐 아니라 그것에 속해있기도 한 ‘우리’에 대항하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을, 비판한다는 것은 우리가 분열된 자아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회를 비판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재생산에 우리가 연루되어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184쪽)> 나아가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그 어떤 권력의 지배력도 필요하지 않는 무한한 지향력의 외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코뮨의 주체가 이미 부정적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지향력에 다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서 코뮨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전의 말의 다른 버전은 아닐까. 사실 현실의 층위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개별화된 부정적 행위(노동)가 자본의 블록화를 통해 우리를 구분하고 나뉘는 보다 원활한 재생산의 기제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 작업장에서 우리의 부정행위는 다 같은 부정이 아닌 것이다. 즉 불법체류 노동자와 우리는 같은 부정행위를 하지만 돌아오는 행위결과의 구분에 의해 부정의 부정을 낳는다. 이는 저자가 비판하는 총체적 계급의식의 형태보다도 보다 세분화된 계급의식을 우리에게 이식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계급의식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또한 유기적 지식인(우리 혹은 그들)과 계몽의 대상, 혁명의 도구로서의 프롤레타리아(그들 혹은 우리)의 낡은 이분법에 의한 해방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며 그들 역시 예전의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하는 외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무런 지표 없는 단순하고도 공허한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마도 우리는 저 단결의 외침에 의아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저 외침에 수신자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수신자는 오히려 차고 넘치는지 모른다. 저 외침은 발신자는 누구인가. 맑스와 엥겔스 역시 부르주아 지식인이었다. 즉 교육받은 지식인들이었다. 당시의 그들은 단 한 번도 공장에서 15시간 동안 부정행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현재의 교육받은 지식인들은 단지 공장에서 노동을 하지 않을 뿐, 지식노동을 통해서 자본의 순종적인 주구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아무리 그들의 무엇에-관한-지식이 민중적이고 사회적 소수를 위한다고 자위해도 <우리 모두가 물신주의에 종속되어 있고, 과학은 행위와 행위결과의 파열에 대항하는 투쟁, 즉 우리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는 투쟁의 일부이(203)>거나 아닐 것이다. 사정이 이럴 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을 파괴하는 이론을 내세우지만 현실의 층위에서 자본을 재상산하는 이론으로 탈바꿈되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좋다. 이 책은 일정부분의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코뮨의 주체가 혁명의 도구이거나 자신을 이 혹독한 노동의 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대체 권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즉 여기서의 주체는 정의되거나 구분되어 동일성, 비동일성으로 환원이 불가능한 주체이다. 그러나 이들은 객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주체로서의 주체이다. 이 주체가 자유롭게 설자리는 분명 작업장 밖이지만 그들의 주체는 작업장에서도 초월적 주체로 서 있다. 이 주체는 투쟁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투쟁한다. 자신의 부정행위에 절규하며 이 <‘절규한다’는 ‘그들은 투쟁한다’로 바뀐다(218)> 부정의 부정이다. <우리는 노동계급으로서 투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계급인 것에 맞서 투쟁하며 계급화되는 것에 맞서 투쟁한다. 우리의 투쟁은 노동의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에 대항하는 투쟁이다(220쪽)> 왜냐하면 이미 계급투쟁 자체가 권력에 대한 하나의 종속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존의 맑스주의의 위기(마르크스의 위기가 아닌)는 해방의 경로가 공장으로부터가 아니라 보다 넓은, 예측 불가능한 영역(학교, 가정 등등)에서 터져 나옴으로서 시작되었다. 즉 프롤레타리아로부터가 아니라 자기가 더 이상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는 부정을 통해서였다. 소위 포스트-맑스주의는 더 이상 해방의 주체가 정의된 계급이 아니라, 더 이상 정의할 수 없는 주체의 산발적인 운동성에 주목한다. 이는 <두 개의 외적 힘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행위(인간의 창조성)와 소외된 행위 사이의 내적 갈등(225쪽)>에 기인한다. 즉 해방의 주체는 단순한 노동자만이 아니라 가정의 어머니, 오염된 강물을 보며 분노하는 환경주의자의 감수성, 자신의 性的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묻는 동성연애자 등등이다. 그것은 현재 스스로 좌파라 자인하는 지식인이 붓을 들어 조선일보의 자본을 후원할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기존의 관념을 뒤흔들며 사회의 여러 다양한 주체들이 자본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들의 내적 갈등은 알 수가 없다. 왜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역된,『사회변혁과 헤게모니』라는 책의 라클라우와의 공동 저작자인 샹탈 무페는 「헤게모니와 새로운 정치주체」라는 소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대는 어떤 현존의 담화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된 집합주체-물론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집합주체의 수준에서의 정치적 적대이다-가 자신의 주체성이 다른 담화들이나 실천들에 의해 부정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부정은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첫째로, 특정한 권리들의 기초 위에 형성된 주체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권리들의 몇몇 실천들 혹은 담화들에 의해 부정되는 위치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럴 때 주체성 혹은 정체성의 부정이 있는 바, 이는 적대의 기반이 된다. 나는 이것이 필연적 적대에 이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어째서 주체의 부정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닐 수 있는가. 이는 그만큼 사회생활의 여러 영역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세밀하게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해방은 다른 하나의 종속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는 우산 공장에서 일하는 아들과 선글라스 공장에서 일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고뇌와 같다. 만약 비가 온다면, 뜨거운 햇빛이 내리친다면 이러한 가정들은 자본의 블록화를 통해 연속된다. 그렇다면 우산과 선글라스를 생산하는 고된 노동에 대한 적대를 접합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우리의 질문은 이어진다. 어떻게 권력에 의하지 않고도 자본에 대한 환경주의자의 적대와 페미니스트의 적대를 접합시킬 것인가. 다시 본 책으로 되돌아와서 저자에게 물어보자. <여타의 급진 이론들로부터 맑스주의를 구분하는 그것의 핵심적 주장은 외부성을 해체하라는 주장이다. ‘그들에’대항하는 그것의 공격의 핵심은 ‘그들이’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지속적으로 우리의 의해 창조되기 때문이다. 우리, 권력 없는 사람들이 모든 힘을 갖고 있다(270쪽)> 여전히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불법체류 외국 근로자와 연대하기 위한 충고로 받아들이기에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우리가 그들에게가 아닌 그들이 우리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만으로는, 나아가 <노동은 자본이 없으면 실천적 창조성, 창조적 실천적, 인간성으로 된다(278쪽)>는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우리에겐 암암리에 급진이론으로 들리기 때문이다(책제목 자체가 이미 급진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급진이론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권력은 아니라고 한다. 국가도, 당도, 조합도 아니란다. 과연 1968년의 5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시위, 동유럽의 붕괴 등등이 그들이 어떤 접합방법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다시 저자는 말한다. <우리의 투쟁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소유와 생산수단 모두를 해체시키는 것이(318-319쪽)>라고, 하지만 어떻게? 물론, 역시 혁명적 투쟁들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어줍잖은 물음과 시원치 않은 대답은 끝이 없다. <이것은 결말이 없는 책이다. 이것은 정의(定義)이되 동시에 그 자신을 부정하기도 하는 정의이다(327쪽)> 그렇다. 우리의 부정은 끝이 없고 그저 물으면서 우리는 걷는다. 사빠띠스따들은 길을 알면서도 묻는다지만, 우리는 정말 길을 몰라 묻는 것이다. 권력이여 안녕? 하고 말이다.


============================================ ▷◁ 대구지하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49 피닉스문예 [펌]김정희 - <숭어의 꿈>(서평) [2] 태경 2004-03-19 5785
48 아우또노미아총서 <겸손한 목격자@....> 범죄수준의 오역 - 제발 번역자 바꿔서 재출간 해주시길.(글수정) soso 2007-12-15 4634
47 아우또노미아총서 [서평]: 『무엇을 할 것인가』(워너 본펠드, 쎄르지오 띠쉴러 편저,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4) file [3] 태경 2004-02-11 4274
46 피닉스문예 [서평]『시지프의 신화일기』 - 고통 속의 인간, 고통 너머의 인간 file [3] 태경 2003-11-25 3510
45 아우또노미아총서 현대사회분석 <지구 제국> 펴낸 조정환 / 대학생신문 이택진 2003-11-25 3410
44 아우또노미아총서 [서평]『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冬童 2003-11-25 3306
43 아우또노미아총서 [re] [서평]『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이택진 2003-11-25 3299
42 아우또노미아총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삶을 해방하는 목적과 수단을 다시 생각한다. 땅누비기 2004-02-07 3277
41 아우또노미아총서 안냐세여~ 땡글이 2004-01-06 3154
40 아우또노미아총서 홈페이지가 참 예쁘네요 나그네 2004-01-06 3090
39 아우또노미아총서 『제국 』, 『지구 제국』 리뷰 - 우리교육 이택진 2003-11-25 2966
38 아우또노미아총서 [지구 제국] 저자 한겨레신문 인터뷰기사 이택진 2003-11-25 2963
37 아우또노미아총서 지구제국,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서평 - 이승준 이택진 2003-11-25 2928
36 아우또노미아총서 [펌|간이역] 뉴욕열전-공간에서의 외침 그리고 사회약자들을 위한 책 file 정성용 2011-01-11 2866
35 아우또노미아총서 <제국의 석양,촛불의 시간> 서평 - 정병진 이택진 2003-11-25 2829
34 아우또노미아총서 [지구제국]출간 인터뷰 - 대한매일 이택진 2003-11-25 2806
33 아우또노미아총서 21세기 스파르타쿠스(조정환 지음, 갈무리) 서평 - 고길섶 이택진 2003-11-25 2749
32 아우또노미아총서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 서평 - 이성문 이택진 2003-11-25 2715
» 아우또노미아총서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서평 이택진 2003-11-25 2683
30 아우또노미아총서 21세기 스파르타쿠스 매일경제TV 소개 이택진 2003-11-25 2671



▷ Tel 02) 325 - 1485 | Fax 02) 325 - 1407 |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18길 9-13 [서교동 464-56] (우편번호:04030) | galmuri94@gmail.com | @daziwonM
▷ Galmuri Publishing Co. 9-13, Donggyo-ro 18-gil, Mapo-gu, Seoul, South Korea (04030)
▷ 계좌번호: 국민은행 762302-04-029172 [조정환(갈)]
X
Login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아이디가 없으신 분은

회원가입 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