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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왑 자유게시판에 올려주신 양새슬님의 배려로 이곳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금현진 기자와 양새슬님께 감사드린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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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제국 』, 『지구 제국』

로두스를 점령하라! 역사의 종말과 ‘제국’의 탄생


리바이어던의 죽음

그 옛날 홉스가 말했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지독히 현실주의적인 규정이자, 자연 상태를 억제하기 위한 자연법의 근거였다. 인류의 근대는 사회계약론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닐 것인즉, 근대 철학, 사상은 물론 온갖 근대적 질서의 핵심에 들어 앉아 천하를 호령하기 시작한 녀석이 있으니, 바로 ‘리바이어던(좥욥기좦에 등장하는 거대 동물)’이었다. 봉건 시대의 종속 상태를 뒤엎고 ‘개인’이 탄생하자마자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모든 권력과 강제력을 독점해 버린 이 괴물. 20세기에 인류가 지나온 살인적 재앙과 비약적 발전의 핵심에는 ‘국가’가 놓여 있었다.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를 거쳐 신자유주의와 지구적 자본의 운동이 지배하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국민국가의 권위에 대한 옹호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미 테러 사건 이후 새로운 야만적 흐름들과 함께 세계는 퇴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제국주의 부활론과 함께 노익장을 과시해 보려던 이 만만치 않은 괴물을 한 방에 날려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역사의 종말을 공언함으로써 영생을 꾀하는,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녀석이 등장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벽 뒤나 창문 밖에도 있다는 ‘매트릭스’이기도 하고 지나친 매력을 지닌 생체 권력이기도 하고 신자유주의와 다국적 기업의 가공할 위력이기도 하고 미국식 패권주의가 벌이는 세계 평화(혹은 안보)의 위장이기조차 한 녀석의 실체는?


제국과 다중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서 종합적이고 학제적인 논의를 통해 새로운 권력 이론을 제시하는 『제국』(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저/윤수종 역/이학사)은 발간 이후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국내에 네그리와 이탈리아 자율주의를 꾸준히 소개해 온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지구 제국』(갈무리)에서 한국의 이론적·실천적 지형에 기반하여 『제국』의 논의를 진전시켰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두 권의 책은 ‘제국(Empire)’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국가 주권에 기반한 국가연합이 아니며 제국주의를 넘어선 초국적인 질서로서 제국은 생산과 교환은 물론 정치, 문화를 비롯해 제계급 형태를 아우른다. 제국은 이전의 주권 형태의 불가피한 특성이었던 영토적 경계에서 벗어나는 한편 탈중심화된 몸체, 잡종적 주체성으로 세계를 통치한다. 그것은 원료나 노동력 등 비자본주의적 자연을 포섭하는 것 대신 제국을 구성하는 ‘다중(multitude)’의 생산능력을 효율적으로 증대시킴으로써 팽창한다. 제국적 주권의 팽창 원리는 민주주의적인데, “제국주의적 팽창이 외부의 파괴, 합병, 내부화의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제국의 팽창은 다중의 힘들을 네트워크에 포함시키면서 오히려 자신을 그 힘들에 개방한다. 다시 말해 제국은 합의의 구축을 향해 움직이며 제국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면서 또 상호 길항하는 힘들의 구성적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재형성한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닫혀 있는 듯이 보이는 제국적 공간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열려 있게 된다.”(『지구 제국』, 45쪽)

‘유동적’이고 ‘매끈한’ 공간으로 표현되는 제국은 무엇보다도 아무런 시간적·공간적 경계나 지배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역사적 계기에 의해 생겨난 체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의 극한으로서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게 된다.
방대한 양의 지적 성취물들을 경유한 이러한 파격적인 개념 제시는 학계는 물론 주류 언론들의 기이한 열광에서부터(「뉴욕타임즈」나 「더타임즈」는 『제국』의 세련미와 인기를 부각시켰다)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의 의혹 어린 시선까지(「국제사회주의저널」 92호에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네그리의 정치적 행보에 맞춰 『제국』을 독해하며 네그리의 ‘조직화된 노동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언급하는가 하면, ‘초월이 없는 기이한 신비주의’라는 다니엘 벵사이드의 표현을 인용한다) 『제국』에 대한 뜨거운 반응들을 낳았다.
그러나 제국은 전혀 새로운 공간 개념만은 아니다. 아니, 그것이 새로운 공간에 대한 강박증처럼 읽히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의 방대한 규모가 신선한 미래학을 위한 정치철학사의 집대성이 아닌 “해방과 민주주의를 향한 공통적 가능성들”의 창조에 바쳐진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제국’은 프롤레타리아트(인민, 민중, 노동자, 농민 등 각기 다른 외투를 입고 있었던)의 혁명적 주체성을 역사의 한가운데에 놓는 역사 해석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다중’은 스피노자로부터 비롯된 개념으로, 수동적인 주체 개념들(mass, people, mob, crowd 등)과 달리 능동적이고 민주적이고 자율적이며, ‘미끄러짐’의 속성을 통해 제국을 구성하고, 궁극에는 제국을 전복할 수 있는 주체로 규정된다. 잠깐 다중이 호명되는 맥락을 살펴보자.

(리바이어던 시대의) “이러한 정치적 이론화 양식은 주체가 사회 이전에 그리고 공동체 외부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따라서 주체에 일종의 초월적인 사회화를 강요한다. 제국에서는 어떤 주체성도 외부에 있지 않으며, 모든 장소는 일반적인‘무―장소’에 포섭되어 있다. 우리 모두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영역 안에 전적으로 실존하기 때문에 정치가 지닌 초월적 허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며 논의할 만한 가치도 전혀 없다. 우리가 탈근대성이 지닌 이러한 철저한 결정(규정)을 인식할 때, 정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론의 지형으로 들어가도록 강요한다.”(『제국』, 452쪽)

여기서 정치의 존재론적 양태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까닭은, 가치의 실재성과 관련이 깊다. 제국에서 가치의 구축은 ‘척도 바깥에’ 측정할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가치는 다시 ‘가상성’으로 이어지며, 이것이야말로 ‘다중 속에 있는 (존재하고, 사랑하고, 변형하고, 창조하는) 활동력’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다중의 가상적 역능은 투쟁에 의해 구축되고 욕망 속에 공고화되어, 가상적인 것으로부터 가능한 것으로, 가능한 것으로부터 현실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근본적인 창조 행위, 즉 ‘산 노동(죽은 노동, 혹은 대상화된 노동인 자본과 대별되는)’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생산력을 지닌 다중은 “제국이 위기에 의해 정의되고, 제국의 쇠퇴는 항상 이미 시작됐고, 결과적으로 모든 적대선은 사건과 특이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제국』, 490쪽)로부터 정치적이게 된다. 단순 집합체가 아닌 ‘새로운 도시의 특이한 권력’으로서 다중의 힘은 그들이 매순간 직접 제국과 직면하는 나날의 삶 속에서 구성적인 활동(국가권력의 장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떤 식의 대표자나 전위로 행세하는 대의적인 활동이 아닌)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구성 권력(constituent power)’이다.

“제국을 떠받치는 다중의 창조적 힘은 또한 대항 제국을, 즉 전지구적인 흐름과 교환에 대한 대안적인 정치 조직을 자율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인 대안을 구축하기 위한 투쟁들뿐만 아니라 제국에 항의하고 제국을 전복하는 투쟁들이 제국적 지형 자체 위에서 발생할 것이다… 투쟁들을 통해 다중은 새로운 민주적 형태들과, 언젠가는 우리로 하여금 제국을 관통하고 제국을 넘어서도록 할 새로운 구성 권력을 발명해야 할 것이다.”(『제국』, 20쪽)


제국의 자리

제국과 다중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 비전은 모호하게 들리기 쉽다. 『제국』에는 천안문 사건이나 인티파다 봉기, LA 폭동과 치아파스 봉기, 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과 96년 한국의 총파업 등이 가능성을 담은 투쟁 사례들로 언급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복수성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능동적이고 자율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으로 꽉 찬’ 다중과 그 역할의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불충분한 느낌이다.
다만, 앞으로 이어져야 할 다중의 실체에 대한 질문은 그 존재 여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현재와 미래의 실천 양상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다중이라는 호명이 기존의 이론들이 간과하고 있던 부분에 대한 중요한 지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체제론과 종속 이론이 ‘주체’를 홀대한 나머지 결정주의적이며 관조적인 이론으로 흐르고 말았다는 조정환의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지구 제국』 28∼37쪽 참조). 같은 맥락에서, 한국에서의 제국적 주권의 양상을 밝히며 집중하는 한국의 종속 이데올로기 비판 역시 ‘사회와 역사의 운동은 자본과 국가에 의해, 즉 지배적인 것들에 의해 추동된다’고 보는 관점에 대한 일갈이다(『지구 제국』 211∼220쪽 참조).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 유토피아적 기념비의 자리에 있다. 문화학자이자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제국』에 대해 “이 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면 이 책은 발명되어야 했을 것”이라며 “우리 시대의 ‘공산주의 선언’”이라고 칭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놀라운 저작임에 분명한 이 책의 이론적, 실천적 정합성과 오류에 대한 판명은 여러 평자와 활동가들의 몫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나, ‘제국’이 교육에 주는 시사점은 더 깊이 탐구되어야만 한다. 근대적 주권 형태, 즉 국민국가의 재생산 기제로서 근대 학교의 출현은 문맹 퇴치와 함께 개인을 규범을 내재화한 근대 시민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제국으로의 이행이 가리키는 국가 주권의 위기가 공교육 기관으로서의 근대 학교의 위기와 어떤 관련을 맺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을 듯하다. 공교육의 기반과 그 정당성을 둘러싼 중구난방의 논의들은 ‘제국’을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으리라. 또한 이전의 억압적 ‘훈육기제’들이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가치 지향을 본성으로 하는 제국에서 복잡다단한 ‘통제기제’로 변화하는 과정과, ‘제국적 통제’의 최종적 수단인 ‘에테르’의 구성 요인으로서 교육 체계와 문화가 행하는 역할에 대한 탐구는 마치 제국 시대의 교육학을 재촉하는 다그침처럼 들린다.

마지막으로 기우를 털어 놓자. 국가 주권에 대한 거부와 근대성에 대한 종지부에 과도한 의미 부여가 앞서서는 안 될 것이다. 한때 현학적 어휘들과 함께 수입된 탈근대 이론들이 지나치다 싶게 유행을 일으킨 뒤, 근대/탈근대 구도의 맹점에 대한 지적으로서 ‘한국의 근대’에 대한 조용한 질문이 뒤따랐었다. 그러한 의문이 제기된 실천적인 맥락이 앞으로도 유효한 것은 물론이다. 한국 상황이 세계사적 맥락에서 어떤 민감성과 가능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이 땅에서 국가 주권의 보호 아래에도 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비참상은 여전히 심각하다.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제국에 저항하는’ 다중으로 규정하려는 순간에도 출발점은 여기에 놓여야 할 것이다.


로두스를 점령하라!

이솝 우화에는 자신이 ‘로두스 섬에서 거인처럼 높이 뛰어오를 수 있었다’고 우기는 허풍쟁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곧 다른 이로부터 “이곳이 로두스 섬이다. 이곳에서 뛰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조정환은 『지구 제국』의 서문을 자신의 ‘로두스’에 바치고 있다.

“다섯 권으로 기획된 저작집의 첫 권을 『지구 제국』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 조건을 한국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보려는 ‘욕심’에서이다. 이 속에서 제국은 전후의 국가주의적 주권 형태들이 봉합하고 관리해 왔던 민족국가 차원에서의 내전을 지구적 규모에서 공공연하게 수행하는 자본의 지배장치이자 내전이 수행되는 탈중심적, 탈영토적 공간으로 설명된다. 이 공간은 내가 오랫동안 찾아헤맸지만 결국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발견한 ‘현장’ 로두스 섬이다. 우리에게 ‘도약’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제국을 괴사시키고 공동화하면서 성장하는 나날의 복수적이고 구성적인 삶 자체일 것이다.” (『지구 제국』, 22쪽)

지난 90년 『노동해방문학의 논리』 간행 이후 오랜 수배 생활을 거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저자의 12년의 지적, 정신적 편력기로도 읽히는 이 서문이 주는 깨우침은 굵고 간결하다. 우리의 로두스가 저들의 로두스이듯, 저들의 로두스가 바로 우리의 로두스다.

금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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