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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9.1.31] 우리의 자율성이 언제나 먼저다 / 염인수 고려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by 김하은 posted Feb 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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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9.1.31] 우리의 자율성이 언제나 먼저다 / 염인수 고려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06


『자본』의 중심이 되는 힘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마르크스가 『자본』전체를 집필할 적에 자본주의 분석의 곁에 언제나 노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계급 대립의 정치적 배치를 전제로 한 경제적 생산양식이자, 상품 형태의 경제적 양식을 전제로 한 정치적 제도가 바로 자본주의이기에, ‘계급투쟁’과 ‘가치론’의 결합은 자본주의 하의 정치 기획에서 언제나 관건이었으며 여전히 관건이다. 『자본』을 정치적으로 읽자는 이 책의 목표에는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그치지 않고 생각해야 할 현재적 긴급성이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 책에는 “노동계급” 범주를 확장하고 노동 관념에서 어떤 숭고함을 벗겨내려는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 해리 클리버는 임금노동과 비임금 노동을 모두 포괄해, 극소수를 뺀 나머지 ‘우리’라는 말로 나타낼 법한, 최대한 폭넓은 사람들이 노동계급이라고 말한다. 투쟁의 원인이자 주체가 바로 ‘우리’이므로, 이 책은 배제가 아니라 포섭을 통해 마르크스의 싸움법을 최대한의 위력으로 증폭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자본이 무엇을 할 수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가, 다른 힘들로부터 자본에 부과되는 제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72면) 자본은 줄곧 자기에게 제약을 부과하는 힘과 대립해왔다. ‘나머지 우리’야말로 현재 자본에 제약을 부과하는 힘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힘으로서 인지하고 있나?


‘노동의 이중적 성격’의 정치적 독해에 의한 노동계급 범주의 확장


‘나머지 우리’의 선차성은 해리 클리버가 보인 바 계급의 “구성 → 재구성 → 탈구성” 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자본』 1권 1장을 면밀히 읽을 때, 자본은 상품형태를 확장하면서 “추상노동” 개념을 사회 공장 전반에 퍼뜨리기 위해 노동계급을 구성한다. →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통일성과 동질성의 새로운 수준을 재구성한다. → 이렇게 “정치적 재구성”된 노동계급에 대항해, 자본은 “자신의 유기적 구성을 새로운 수준으로 고도화”하는 탈구성으로 맞선다.


위계적 계급 분할(예를 들어 성별 분할이나 인종 분할)들의 특수한 배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노동계급의 각 부문이 주체가 된 정치적 재구성과 자본이 주체가 된 탈구성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추상노동 범주는 이 검토에 필요한 이론적 토대로 된다. 해리 클리버는 추상노동 범주의 계급적 성격을 파악하는 일에 엄청난 정치적 중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추상노동이 단지 상품 가치의 실체로 분석되고 이해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서부터 자본주의 생산양식, 오늘날 우리 현실의 계급투쟁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 책은 가치 실체인 추상노동의 척도로서 『자본』 1장에서 논해지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의미를 다시 고찰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상품을 생산한 개별 노동자와 직접 연결된 시간으로 보는 일은 마르크스를 오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추상노동”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범주를 통해 우리는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을 모두 포괄하도록 노동계급을 팽창시킬 이론적 토대를 얻는다. 이 맥락을 조금 더 따져보자.


『자본』을 자본과 노동계급 간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내려는 저자의 기획에 의하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서 산정된 노동시간(노동계급 전체로 볼 때 하나의 구성 부문에 불과한)은, 직접생산자의 노동시간이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의 논변 중 “집계적 노동자” 즉,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력과 생산기계 전체를 함께 구성하는 경쟁하는 다양한 노동력들” 혹은 “전체로서 고려된 집합적 노동자”라는 관념을 가져옴으로써, 이 책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노동만을 강조한다고 보지 않을 수 있었고,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생산적 노동자와 비생산적 노동자를 분리한다고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반대로 이 책은 마르크스가 강조한 노동의 이중성을 적극적으로 읽어내어, 실제의 유용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추상노동을 구성하는 노동시간에 주목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이렇게 이해하면 이 시간에는 임금 노동과 비임금 노동이 모두 포함된다. “마르크스에게서 늘 그렇듯이, 사회적 결정이 핵심적이고 개개의 특수성은 파생적이다.”(p.268)


‘시간’을 이처럼 파악할 때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은 산업노동자와 공장주 간 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와 자본 간 투쟁이다. 그래서 “가사노동이나 학업의 증대는, 노동계급의 재생산에 필요한 가변자본의 양을 감소시킴으로써 잉여가치의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 비임금 노동인 가사노동이 더 많이 수행되고, 학업을 더 열심히 할수록, 더 적은 가치의 가변자본만으로도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비임금 시간을 자유시간으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축적 과정 내에 통합하기 위해 문화적인 것에서부터 오늘날에는 빅데이터의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노동계급과 대립한다. 바로 2018년 연말 뉴스에서 청소년들의 고민을 토로하는 앱을 만들고, 그 앱에 담긴 넋두리들을 데이터로 변환해서 판매하려고 한 한 회사 이야기를 봤다. 자본은 우리의 심리적 괴로움을 익명으로 나누려는 시간조차 가치(잉여가치)를 산출하는 시간, 곧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전환하려 한다.


마르크스의 ‘독창적 발견’과 가치론의 여전한 정치적 중요성


우리는 마르크스 텍스트 도처에서 노동의 이중성 파악(과 잉여가치 관념의 창안)을 자기 최고의 업적이라고 밝힌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리카도의 노동가치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도 『자본』의 가치론이 어째서 그렇게나 독창적일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초기 텍스트로 돌아가 보자. 『철학의 빈곤』(1847)에는 고전적 정치경제학 저술들에 대한 마르크스 자신의 비판적 이해가 이미 담겨 있다. 금속화폐량의 증가로 인해 발생한 화폐의 평가절하를 암시하면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교환 매개 수단의 증가는 결과적으로 한편으로는 임금과 토지 지대의 하락을 불러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 이윤의 증대를 불러왔음이 충분히 증명됐다. 다른 말로 하면, 지주 계급과 노동자 계급, 봉건 영주와 민중이 추락한 만큼 자본가 계급, 부르주아지가 올라갔다.”(이승무 번역, 『철학의 곤궁』, p.169)


이런 이해에는 인플레이션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려는 자본의 전략이라는 사고방식의 원형이 있다. 전에는 동전 하나로 빵 하나를 샀는데 이제 동전 두 개로 빵 하나를 산다면, 1동전의 가치는 1빵에서 1/2빵으로 줄어들었다. 100동전을 임금으로 받는 노동자였다면 100빵에서 50빵을 받게 되는 셈이므로, 임금의 가치는 하락했다. 이런 해명은 화폐의 수량과 상품가치를 관련시키므로 통화주의자의 설명과 닮아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적 사고의 독특함은 여기에 계급 대립을 겹쳐놓는 데 있다.


상품의 가치변동에 대한 설명은 『자본』까지 오면 단지 통화량 변동과 연관되는 게 아니라, 가치 및 가치의 실체로서 노동의 이중성 문제와 직접 관련지어 논해진다. “주어진 시간대에 동일한 수의 노동자들에 의해 두 배의 사용가치가 생산된다고 말하는 것은, 유용노동의 생산성이 두 배로 향상됐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시간이 동일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생산물의 각 단위에 포함된 추상노동의 가치는 반으로 줄어든다”(이 책 p.296)는 식이다.


이제 상품 가치와 노동계급의 이로움 사이의 관계 양상은 상품형태의 본질을 구성하는 차원에서 논해진다. 계급투쟁은 상품 세계인 자본주의의 근본적 중심에 놓인다.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과 연결될 이런 방식의 논변은, 이 책의 개념파악을 따라 보자면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구성에 저항한 노동계급의 재구성으로서 노동일(Working day; 노동자가 출근에서 퇴근까지 하루 일하는 시간을 한 단위로 해 이르는 말)을 둘러싼 투쟁 이후, 자본의 탈구성으로서 생산성 향상의 전략을 조사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기도 하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치론”을 통해 “자본이 강제하고자 하는 노동(추상노동)의 분명한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던 생산성 변화의 의미를 처음으로 분석할 수 있게”(p.296) 됐다.


‘을들의 갑질’에 냉소하거나 우울해하는 우리에게 이 책이 주는 교훈


자본주의 상품세계가 노동계급과 자본 사이의 투쟁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는 교훈, 『자본』 1권의 1장에서 다뤄진 가치론이야말로 노동계급에 저항하는 자본이 우리의 “무엇을 얼마나” 전유하는지를 알려준다는 교훈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노동계급 각 부문 간의 위계적 분할(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국민과 이주민 등의 분할) 문제를 정치적으로 고쳐 사고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상품형태의 세계는 언제나 일반적 등가물(이 자리엔 화폐, 성별, 제도 등 모든 게 올 수 있다)이 매개된 총체를 구성하려고 하므로, 노동계급의 저항은 매개를 폐지하려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고, 따라서 매개 없는 노동계급 각 부문의 자율성이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p.331) 남성의 매개를 우회하면서 자본에 직접 임금을 요구하는 여성의 사례나, 교사의 매개를 우회하면서 학교와 직접 대치하려는 학생의 사례를 든다. 그리고 매개를 우회하든 그렇지 않든, 한 부문의 저항은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1960년대 미국 고등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저항은 결국 “더 적은 노동과 더 많은 화폐에 대한 교사들의 새로운 요구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한 요인”이 됐다. 자본의 명령을 떠안은 교사의 권위가 학생의 반항을 이끌어내고, 학생의 반항이 교사로 하여금 자본에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만들었다면, 이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도 분명한 시사점이 있다.


마트 계산원이, 서비스 노동자가, 부하 직원이, 학교 학생이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내가 자본의 입장에서 갑질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저들(자본)은 한없이 뻔뻔한데도, 우리는 경제활동과 일상생활에서 다른 노동자들의 ‘게으름’과 나에 대한 ‘푸대접’에 분노할 때마다 스스로를 탓하곤 한다. 개인윤리의 관점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고, 이런 식의 ‘내 탓’을 우리 모두에게 전염시켜 좌파 전체가 냉소나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저런 식의 게으름과 푸대접이 우리 스스로를 향한 게 아니라 자본의 전략에 대한 우리 노동계급의 저항임을 가르쳐 준다.


서비스 노동자가 ‘평가는 꼭 상으로 해주시고요’라고 내게 건넨 한 마디가 평가체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자본의 생산성 관리 전략 자체를 파괴하려는 작지만 큰 저항임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요컨대 다른 노동자의 게으름과 푸대접에 분노할 때마다, 총파업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작은 사보타주가 자본의 기획 자체를 타격하는 실행이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냉소적 관점 내지 우울증적 관점은 다른 을들에게 갑질하는 을들을 조소하거나 죄의식에 빠뜨린다. 그러나 서비스 노동자, 학생, ‘아랫사람’에게 행하는 갑질이 결과적으로 모든 을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제로 이런 을들의 반란이 곳곳에서 실현 중이라는 점에서, 이런 경향은 책의 표현을 빌자면 “전반적으로 새로운 세력 조정을 창출”할 계기가 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와 자책이 아니라 이런 낙관성이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를 파괴하는 방법이 ‘단결해 싸우자’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p.333) 우리는 노동계급 각 부문의 자율적 투쟁들의 성격을 더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며, 여기에 『자본』의 가치론을 정치적으로 읽어낼 보람이 있다.


글‧염인수
문학박사. 고려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제이슨 바커의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 브루노 보스틸스의 『공산주의의 현실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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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해리 클리버 지음 | 조정환 옮김 | 갈무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