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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호씨는 죽어서 시를 남겼을까요? 사랑과 믿음과 나눔과 눈물과 웃음이 메마른 우리 세상을 촉촉히 적시며 가슴마다 속삭이는 시 말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땅에 반가운 꿀비를 내리는 시 말이에요.
================ 메인용

배달호씨는 죽어서 시를 남겼나?
[책읽기가 즐겁다 40] 시모음 <호루라기>가 바라는 우리 세상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최종규(함께살기) 기자   
<1>

배달호씨는 죽어서 시를 남겼을까요? 사랑과 믿음과 나눔과 눈물과 웃음이 메마른 우리 세상을 촉촉히 적시며 가슴마다 속삭이는 시 말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땅에 반가운 꿀비를 내리는 시 말이에요.

▲ 시모음 <호루라기> 겉그림입니다.
ⓒ2003 갈무리
설거지하다 무심히 그의 집을 본 순간
티브이 속 기자의 두 팔이 30년 보일러공이었다는
그의 집 거실을 뚫고 방으로 꺾인 순간 식탁 놓을 자리도 없다
불평하던 우리 집 거실이 출렁출렁 넓어지던 순간
그가 분신했다는 공장 콘크리트 바닥과 농성 중인 깃발들을 뚫고
좁아터진 집 어딘가에 숨어있을 그의 노모 구부러진 생애가 보이는
순간 나는 냉동실에 갇혔다 ...... <김해자-사랑하기에 충분한 시간>


정몽헌 회장이 죽었을 때와 배달호 노동자가 죽었을 때는 사뭇 다릅니다. 재벌 회장은 한 사람이 죽었으나 공장 노동자는 나날이 죽고 농민도 나날이 죽습니다. 죽은 사람은 더 말이 없으나 살아 있는 우리들은 말을 합니다. 대통령도 나서서 말을 합니다. `죽음으로 어떤 목적을 정당화하거나 이루려고 하지 말라'고요.

노동계를 달래는 정책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 똑같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마다 다른 일을 하는 우리들일 텐데,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일한 만큼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더도 덜도 말고 `일한 댓가'를 `떳떳하고 올바르게' 받을 수 있는 제도와 정책만 꾸리면 좋습니다.

...
유서를 준비하고 몸에 얹을 기름을 준비하면서
왜 집안의 수도꼭지를 고치셨습니까?
경품에서 형수님이 김치냉장고 당첨되었다고 왜 자랑을 하셨습니까?
... <강웅표-열사여 우리의 투쟁을 지켜주소서>


정몽헌 회장이 죽은 일을 두고 `죽음으로 무엇을 정당화하려고 했다'는 말을 하지 않은 대통령이고 우리네 언론이고 사회입니다. 그런데 여느 노동자가 죽을 때는 꼭 그런 말이 나오니 안타깝습니다. 다들 똑같은 사람일 텐데. 다들 자그마한 꿈 하나 안고 조촐하게 살아가고팠을 텐데 말이에요.

<2>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하는 법이 있는 나라라면 참다운 민주주의 나라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나라는 누구에게나 법을 똑같이 적용하고 있을까요?

...
저 간악한 두산자본의 가압류 / 해고당한 동지들을 볼 때마다
그리도 가슴앓일 했더란 말입니까 / 하지만 그런 것들조차
착취를 위한 탄압의 일종일 뿐 결국 / 추악한 자본이 그대를 죽인 것이오

그댄 나와 동갑내기 / 우리 세대는고만고만한
가난한 농사꾼 아들에서 노동자로 / 수없이 빼앗김의 세월 살아왔으니
이젠 편안한 삶만 누려도 부족하거늘 / 늙은 노동자의 생목숨까지 앗아가다니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오... <안윤길-떠나는 그대에게>


지난 9월에 <호루라기>라는 시모음이 나왔습니다. 시모음 <호루라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 배달호씨를 기리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배달호씨는 자신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게 자신들 목을 옥죄는 `가압류'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밝히며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배달호씨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아요.

또다른 죽음이 자꾸 일어나요. 집권자가 보기에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속셈으로 목숨까지 내던지는 끔찍한 짓인지도 몰라요. 하지만 죽음보다 더 끔찍하게 목을 죄는 현실을 보지 않는다면 괴로운 사슬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왜 항의를 하고 집회를 하는지, 왜 파업을 하고 거리로 나오는지를 제대로 살펴야 해요. 도대체 현실이 어떠한지, 일한 만큼 대접을 받는지 받지 못하는지를 살펴야지요. 살림살이가 어떠한지 헤아리면서 노동자들이 말하는 외침이 옳은지 그른지를 살펴야지요.

달이 가고 / 해가 바뀌어도
바람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오뉴월 뙤약볕에서도 / 등골 서늘한 한기를 느낍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 손배소 가압류

말로는 모두 / 세상 좋아졌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 움츠리고 살아야 하는 / 노동자에겐
언제나 싸늘한 겨울입니다 ... <배재운-겨울나라>


시모음 <호루라기>는 떠나간 배달호씨를 기리는 시와 더불어 이 땅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이야기합니다. 일한 만큼만 대접을 받기를 바라지만, 그런 대접조차 턱없이 사치스러운 것인 듯 비틀어버리는 사회에 내뱉는 피울음이라고 할까요.

어릴 적에 하던 딱지치기 / 따고 잃는다는 것보다
서로 어울려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나이 들어 사랑할 때는
딱지맞을 수도 있고 딱지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생김새나 가진 정도에 따라 조금은 불공평하지만
불꽃 튀는 정열이 있어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 어느 날 노동자라는 딱지가 붙게 되면
그것은 한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 벗을 수 없는 멍에가 됩니다

이쯤 되면 / 딱지놓을 수도 없습니다 ... <배재운-딱지>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모두 같은 사람이에요.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모두 같은 사람이고요. 배달호씨가 바란 세상도, 시모음 <호루라기>에 올올이 담아서 외치는 세상도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에요. 남보다 더 먹지도 않으나 남보다 덜 먹지도 않는 그런 세상 말이에요.

<3>

시모음 <호루라기>에 담은 시를 가만히 읽습니다. 찬찬히 읽고 속으로 헤아리고 다시 읽어 봅니다. 시힘이 모자라거나 풋풋함이 묻어나거나 목소리만 너무 높은 시도 적잖이 보입니다. 그러나 꾸밈이나 숨김이 없이 우리들 삶을 이야기해요. 털털하게 우리들이 겪은 아픔과 슬픔을 담습니다. 앞으로는 눈물보다는 웃음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요.

끼니를 굶는 아이들도 / 그렇게 배울 것이다
대한민국은 / 민주주의를 꽃피운 나라
자유와 분대를 / 공평하게 누리는 나라
땀흘리는 사람이 대접받는 나라
노동자 / 농민이 / 거듭 분신을 할지라도
우리 아이들은 / 그렇게 교육을 받을 것이다 <이한걸-모순>


세상엔 아름다운 시가 많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고 구름과 달과 별과 해와 꽃과 벌나비와 노니는 시도 많아요. 애틋한 마음을 수줍게 나누는 시도 많고 정겨운 속삭임으로 달콤나른함을 풀어헤치는 시도 많습니다. 그런 시들도 좋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런 시들도 시일 테고, 우리가 가까이 만날 수 있겠지만, 잠깐 눈길을 들어서 옆도 쳐다보고 뒤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세상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시만 있지 않다고, 죽음과 아픔과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시도 있다고, 보기에는 좀 어설퍼 보일지 모르나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곰살맞은 시도 있다고, 나아가 그저 먼 나라 사람 이야기이거나, 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듯할 수도 있지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모습을 이야기하는 시도 있다고…. 그런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
벗이여,
노동자라 말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넘쳐나고
위에서 아래를 측은해 하는
눈높이가 다른 부끄러운 시를 민중시라 부른다지만
세상의 바닥에 닿아보지 못한 절망을
모르는 자는 감히 노동자라 말하지 마라
썩어가는 송장의 진물 흐르는 입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시를 더 이상 민중시라 말하지 마라
... <정유리-부질없는 시>


어리석은 줄 알지만 달걀로 바위를 치며 바위가 깨질 때까지 애쓰는 사람들도 있어요. 힘들어도 여럿이 어깨동무를 하고 한 걸음씩 천천히 소걸음을 걷는 사람들도 있고요. 시모음 <호루라기>는 우리들 삶을 이루는 소중한 사람들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위도 아래도 아닌,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를 담았어요.

스스로는 시를 쓰는 사람이 못 되었을 수 있는 배달호씨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에 어깨동무를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시가 하나둘 모였어요. 이제는 `잊혀진 죽음'이 되었는지 모를 배달호씨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배달호씨를 기리며 이 땅에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며 쓴 시가 모이니 이렇게 책 하나가 되었군요.

이 책은 책방 한켠에 찌그러져 있을지도 모르고, 어느 책방에는 아예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보는 마음이 있고, 어깨동무를 할 벗을 찾는 마음이라면 즐겁게 이 책 <호루라기>를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2003/11/20 오후 4:34
ⓒ 2003 Ohmynews
◀ 원래기사로
  • ?
    조정환 2003.11.26 22:10
    옮겨 올 때 제목에 글쓴이의 이름이 나타나게 하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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