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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다 2018.4.13] 나를 노예로 만드는 빚의 지배를 거부하라! / 안태호(협동조합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e_text&ps_boid=218


몇 해 전, 함께 일하던 동료는 일이 정말 하기 싫어지면 백화점을 간다고 했다. 거기서 실컷 카드를 긁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카드 명세서가 날아온다. 그 명세서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웃픈’ 농담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의 책 <부채통치>에서 놀랍도록 똑같은 상황을 발견한다.

“신용카드는 소비사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구매를 자극하고 권장하고 간편화함으로써 소비자/채무자를 흥분과 욕구불만의 악순환 속으로 밀어 넣는다. 무한한 부채는 무한히 반복되는 소비 활동이라는 결과를 낳는 원인이자 조건이다...(중략)... 카드 지불 시스템은 이렇게 해서 영원한 부채 구조를 확립한다.”

어떤가, 조금은 섬뜩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지금은 신용카드를 넘어 각종 핀테크 산업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신용’을 기본으로 사람들을 부채 구조에 포섭한다는 데서 별다른 차이는 없어 보인다.

부채, 빚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게으름이나 죄, 무능력에 가 닿아 있다. 종교적인 관념에서 연원하는 죄책감은 물론이고, 부채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리스트화하면 세상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든다. 부채는 공공의 재정을 파탄내고, 성장의 가능성을 잘라버리고, 실업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근본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나라 빚이 얼마라느니, 가계부채가 역대 최대라느니 하는 언론기사는 이런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잠 잘 시간마저 쪼개고 편의점에서 빈약한 음식을 섭취하며 장시간 고된 노동을 계속해도 빚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단지 개인의 ‘한심함’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저자는 부채가 개인의 문제, 혹은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 있다고 단언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부채는 무한하고 조절 불가능한 것이어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기제로까지 작동한다. 몇몇 이들은 아마도 그리스나 스페인의 경제위기를 즉각적으로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장 97년 금융위기 당시 국내에서 겪어야 했던 굴욕적인 민주주의의 후퇴양상만을 생각해 봐도 충분하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사회적 권리는 너덜너덜해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형편없어졌다. 반면 재벌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놀라울 만큼 커졌다. 자본의 자유는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확장됐지만,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적, 민주적 모조품만이 허락되고 있는 것이 지금 세계의 모습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하의 부채는 예속과 종속으로 귀결되는 하나의 정치적 관계다. 부채는 사람들을 길들이고 구조개혁을 강요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도구, 즉 자본의 이익을 따르는 '기술적 통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도구라고 본다. 저자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등을 프리즘 삼아 통치성 개념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한국에서는 정치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라는 선언(?)을 하기도 했지만, 랏자라또는 국가마저도 사실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은 – 비록 국가가 큰 역할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 비단 하나의 ‘국가 테크놀로지’에 그치지 않는다. 1970년대 이래 우리는 통치성의 사유화(민영화)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를 목격하고 있다. 통치성의 사유화는 더 이상 국가에 의해서만 수행되지 않으며, (’독립적인‘ 중앙은행들, 시장, 평가기관, 연기금, 국제지구 등) 비 국가 제도들의 집합에 의해 수행된다. 이러한 집합에서 국가 행정은 그것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이며, 중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여러 다른 요소들 중 하나 이상이 아니다. 이러한 점은 위기 시(국제통화기금,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이라는) ’트로이카‘가 보여준 행위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제학자이자 예술가인 김재준 교수의 해제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 어설픈 희망보다 완벽한 절망이 차라리 낫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현재의 절망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인식을 확보할 것을 주문한다.

“경제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학자들은 아마도 결코 프랑스 철학자들을 읽지 않을 것이니, 결국 해결책은 경제문제에 관심이 있는 철학자들이 수학, 통계학, 경제이론을 배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만난 국사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한국법의 식민지적 기원을 연구하다가, 법학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절망적으로 없었기에, 스스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법학을 알게 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가 들뢰즈를 인용해 하는 말을 되새겨 보자. “걱정하거나 희망할 필요는 없고, 새로운 무기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는 새로운 인식과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상황은 어느 모로 보든 낙관적이지 않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듯 래디컬(radical) 이라는 말은 급진적이라는 뜻과 함께 근원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워낙 압도적인 상황에서 근원적인 사고는 설 자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저자의 해법도 어찌 보면 무기력하게 느껴질 지 모른다. 부채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서 랏자라또는 ‘노동의 거부로부터의 출발’을 제시하며 맑스의 사위로 유명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를 가져와 게으른 행동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게으른 행동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 ‘최소한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거부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 속에서 그것에 의해 미리 확정되어 있는 어떤 정체성, 역할, 기능에 대한 거부이다. 결국 노동의 거부는 통치성 기술 일반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노동거부의 잠재성을 다양한 영역에서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제안이다.

결국 부채 통치에서의 해방은 경제적 행위(부채상환)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거부)로부터 가능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 행위에는 대상의 작동원리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랏자라또의 이 책은 부채 통치가 작동하는 양상과 원리를 세심하게 분석해놓았다는 점에서 값진 이론적 축적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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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통치 |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 허경 옮김 | 갈무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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