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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 위클리 2013.4.5] 죽어가는 도시 사이로 거리는 어떻게 반복하여 되돌아오는가? / 이진경

by 김하은 posted Apr 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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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의 해제로 실린 글입니다.

렘 콜하스는 『정신착란의 뉴욕』¹을 통해 뉴욕이라는, 어쩌면 20세기의 상징적인 도시가 되어 버린 도시에 대해, 그 도시의 마천루와 그 옆의 코니아일랜드에 대해 ‘애정 어린’ 선언문을 쓴다. 그가 대도시에 대해 이렇게 천착하게 했던 것은 필경, ‘68’이란 숫자로 표현될 어떤 ‘시대감정’ 속에서 도시에 대해 연구했던 아방가르드들이었을 것이다. 저널리스트였던 그를 건축학교로 가게 만들었던 것은 상황주의자였던 콘스탄트 니우벤후이스였고, 그가 건축을 배웠던 것은 <아키그램>이 주도하던 런던의 건축학교 AA에서였다. 또 사실상은 건축 자체를 비판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갔던 슈퍼스튜디오나 도시를 ‘절단하여’ 전혀 다른 기능으로 전용하고자 했던 기 드보르² 등 상황주의자의 반기능주의적 구상, 그리고 공장과 슈퍼마켓이란 모델 주변을 맴돌고 있는 미래도시의 전망 속에서 동질화되고 획일화된 정크 스페이스를 포착했던 <아키줌> 등 1960년대를 만들어갔던 아방가르드의 혁명적 사유 속에서 그는 도시에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 같다. <대탈출:자발적 감금자>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뉴욕 전체를 거대한 구조물로 둘러싸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버리겠다는 초기의 불가능한 꿈은, 이런 아방가르드의 눈을 통해 그가 도시를, 세계를 보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어차피 현실을 초과하게 마련인 게 꿈이고 유토피아지만, 자본주의와 근대 도시에 대한 분노에 의해 증폭된 도시적 몽상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건축물들과 대조되는 순간 쉽게 무너지게 되는 듯하다. 사실 그 몽상은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꿈이기에,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삶에 눈을 돌리는 순간, 금방 사라지기 십상인 그런 꿈이다. 그 와해된 꿈의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려는 발상이 싹트는 것을 대체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콜하스가 ‘정신착란증’에 빠진 도시에 애정을 갖고 그것을 위해 대신 선언문을 써 주겠다고 했던 발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다. 또한 와해된 혁명의 꿈을 잔해처럼 가슴에 안고 지극히 이질적인 사람들이 더없이 밀집되어 사는 ‘지저분한’ 뉴욕의 거리에서 뉴욕을 주인공으로 하는 ‘열전’을 쓰게 되었던 이와사부로 코소의 문제의식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다. 코소의 『뉴욕열전』과 『유체도시를 구축하라!』, 그리고 『죽어가는 도시, 회귀하는 거리』는 뉴욕이란 도시로 하여금 말하게 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콜하스의 『정신착란의 뉴욕』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도시를 보는 방식의 차이는 도시가 ‘건네는 말을 듣는’ 방식의 차이로 이어지고, 그것은 도시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방식의 차이로 또 다시 이어진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콜하스는 어쩔 수 없는 건축가였다. 도시를 건축물을 통해 이해하고, 어떤 건축물을 지을 것인가, 어떤 도로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사고하고 어떤 식으로든 건축물을 짓는 실질적인 작업을 해야 하는 직업적 지위는 도시를 건축물들을 통해 이해하게 하는 것 같다. 비록 도시가 단지 건축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며 삶의 과정이 진행되는 공간임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건축가가 건축물을 통해 도시를 이해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즉시 잘 알고 있던, 혹은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있던 그 도시의 대중들은, 거리를 오가고 만나며 때론 싸우고 때론 함께 웃는 삶은 건축물 뒤로 사라져 버린다. 르 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는 이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도시란 조각품처럼 멋진 건축물들의 집합일 뿐이다. 그의 도시 속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며, 그가 만들어 주려는 도로는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없는 도로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도시에 대해 가장 많이 말을 하지만 도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빈번하게 실패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건축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물론 콜하스의 책에 사람이 없다거나 삶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령 그가 1931년 만들어진 뉴욕의 38층짜리 다운타운 운동클럽에 대해 쓸 때, 그는 그 건물의 각 층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람들에 대해 주목한다. 스포츠 클럽에서 권투를 하다가 9층에 가서 글러브를 낀 채 생굴을 까먹는 것……그 건물은 그렇게 이질적인 방과 삶이 공존하는 공간인 것이다. 수직적 구조 속에 밀집됨으로써 고도로 응축되는 그런 이질적인 삶의 집합. 그는 여기서 맨하튼의 잠재성이 최대한 발휘되는 것이라고 보면서, 이를 러시아 구축주의자의 개념을 빌어 ‘사회적 응축기’라고까지 말한다. 콜하스는 이질성이 공존하며 응축되는 이런 구조를 옆으로 벌려 놓는 것만으로 ‘해체적인’ 공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리의 라 빌레트 공원을 위한 그의 계획안이 바로 그것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고찰이 보여 주는 것은, 건축을 통해 혁명의 응축기를 만들고자 했던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에게조차 사람들의 삶은 건축물의 물리적 효과에 의해 규정되는 종속변수였을 뿐이라는 사실인 것 같다. 즉 건축가는 도로와 건축물을 만들고, 그 물리적 환경의 제약과 규정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건축을 삶의 문제로 생각하고자 했던 혁신에도 불구하고 구축주의자들이 실패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혁명 없는 응축을 생각했던 콜하스로서는 실패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 건물을 짓던 건축주나 개발업자, 혹은 상인들은 자기 내키는 대로, 아니 돈 되는 대로 사용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는 도시적 삶이, 아주 밀집되고 응축된 힘을 갖고 만들어질 테니까. 이 경우 건축가가 할 일은 별로 없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도시적 삶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힘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건 좋게 보아도 상업주의적 아나키즘 이상이 되긴 어려울 것 같다.

뉴욕에 대한 코소의 작업들은 건축가의 이런 관점과 달리 거리를 통해,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런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민중들을 통해, 스스로 그 거리의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관점에서 뉴욕이라는 도시를 본다. 이 경우 가령 동일하게 ‘밀집’에 대해 말할 때에도 그것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갖는 잠재적 힘의 생성으로 포착된다. 도시의 힘, 그것은 바로 이런 대중적 밀집이 갖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그 밀집은 그 자체로 ‘공통의 부’(commons)³라는 것이다.

이는 가령 ‘홍대앞’이라고 불리는 거리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홍대앞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거기에 멋진 건물이나 강력한 응축효과를 갖는 높은 건물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 거라면 용산역 앞 대로에도 있고, 송도 국제도시에 가면 더더욱 많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불러들이지 못한다. 혹은 분위기 좋은 카페나 술집이 많아서 그런 것인가? 반대일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몰려오기에 돈 들여 멋진 카페나 술집, 클럽이 만들어지는 것일 게다.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들지 않으면 그런 상점들은 곧바로 문을 닫고 거리는 황량해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중을 끌어들이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어떤 활동이 거기서 벌어지고 그 활동에 이끌려 사람들이 모여들며 그렇게 모여드는 사람들 앞에서 나름의 재능을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들며 그것이 다시 사람을 끌어들이는 포지티브 피드백의 과정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건물들을 사용하는 어떤 활동, 건물들 사이에서,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활동, 혹은 그런 사람들의 밀집 그 자체가 다시 사람을 끄는 것이다. 그것이 지대를 인상시키고 건축물을 돈 들여 새로 짓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는, 코소가 뉴욕의 소호거리에서 발생한 유사한 과정을 통해 예견하게 해 주는 것처럼, 바로 이런 과정이 임대료 상승을 매개로 그 거리에 사람을 끌어들였던 이들을 쫓아내고 그들로 인해 모여들던 사람들을 흩어 놓으며, 그로 인해 결국 멋진, 그러나 텅 빈 건축물만 남는 결과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시를 멋진 건축물이나 기념비적 건축물 같은 ‘누각’과 민중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거리’의 대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항대립에 대한 알려진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단지 건축물의 집합으로, 혹은 조닝된 대지와 자동차가 독점한 도로들의 체계로 이해되는 일반적인 경향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이항적 대립은 도시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한 걸음 크게 진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건축물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러나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 도시를 만들어 가는, 사실은 도시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결정적인 성분이기 때문이다. 콜하스의 뉴욕을 읽고 얻은 실망감과 반대로 코소의 책들이 다시 찾아 읽게 만드는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번 책에서 ‘뉴욕열전’이나 ‘유체도시’라고 하나의 단어로 명명되던 것에 ‘죽어가는 도시’와 ‘되돌아오는 거리’를 대비시켜 제목에 달았던 것은, 그가 이 도시를 보는 관점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는 도시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누각과 거리의 분리과정’이 거스르기 힘든 힘과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로 요약된다. 이는 건축과 민중, 건축물과 삶, 고정체와 운동체, 자동차와 보행자 등의 수많은 동형적인 대응물들의 대립으로 확인된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대립이 개별 도시라는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을 넘어서 메트로폴리스와 메가슬럼의 글로벌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이전의 책을 쓰면서도 그는 이 두 가지 요소의 대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대립, 그리고 그 대립 속에서 ‘결국은’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뉴욕을 자동차와 개발업자들의 도시로밖에는 보지 않았던 독재자 모제스에 대한 그리니치빌리지의 투쟁과 성공(이는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⁴이란 책을 낳은 모태였다), 혹은 <태양의 집>이나 수많은 스쾃터들의 장기간 점거나 ‘승리’ 등은 누각과 거리의 민중이 좋든 싫든 부딪치고 대결하고 하나의 도시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 아직은 가능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가속화된 젠트리피케이션의 속도,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기 위한 행정가와 경찰들의 발 빠르고 폭력적인 개입이 전면화되고 있다는 점이 반복하여 지적된다.

그 결과 뉴욕은 ‘투자게임의 대상으로서 메트로폴리스 중심부에 세워진 수많은 “누각”들은 사용가치를 박탈당한 무인공간이 되었고, “거리”는 점점 더 중심에서 멀어져 변두리로 이동하면서 어쩔 수 없이 흘러 다니고 있다. 민중적 생활권, 보헤미아, 다운타운은 맨하튼섬을 떠나 브룩클린, 브롱크스 등 변두리를 향해 원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더불어 ‘누각을 방위하고 거리를 통제하는 “보안문화” 혹은 무관용 정책이 중심부를 점령해 갔다. 경비원만 있는 텅 빈 건물이 급증하고 거리는 그로부터 점점 더 멀리 흩어져 갔다.’

이러한 경향은 심지어 자동차 도로와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항하는 투쟁에 승리했고, 그 속에서 ‘거리’로서 도시를 생각하고 만드는 법을 발견하여 도시에 관한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 냈던 제인 제이콥스‘의’ 그리니치빌리지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현재 그리니치빌리지 지구의 보도에는 누각―요컨대 낡은 거물, 장기 거주자, 화랑, 소규모 부티크, 고급식료품점, 민속풍 레스토랑 등―이라는 의미에서 도시적 ‘본래성’authenticity이 남아 있긴 하지만, “거리의 사회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결국 그 곳은 젠트리피케이션 이후의 백인중산계급의 회고적 취미를 대변하는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안타깝게도, 맨하튼의 다운타운에 남아 있는 것은 건축일 뿐 민중들의 사회적 상호관계성의 공간적 생산은 붕괴했다.’ 공동화된 도시, 사람들의 삶이 쫓겨난 도로들, 이는 도시에 공동화로 표상되는 죽음의 대기가 확산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도시가 점차 죽음의 공간으로 되어가는 내포적 양상을 표시한다면, 이런 도시의 거대한 확장은 죽음의 공간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코소가 ‘도시의 죽음’과 구별하여 ‘죽어가는 도시’라고 했던 것은 지금 더욱더 강하게 부상하고 있는 이런 도시의 경향을 지칭한다.

물론 그에 대한 민중의 대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두드러진 것은 스쾃이 불가능해진 그 자리에, 점거occupation가 대신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부구조의 불완전함과 시와 경찰에 의한 강제퇴거로 인해 그들의 점거행위는 지극히 단기간 가능했을 뿐 주거행위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현재진행형의 위기상황에서 정주를 전제로 한 스쾃은 어디까지나 지하underground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스쾃은 공개되자마자 그 자리에서 강제로 퇴거된다. 이에 대응하는 가능한 직접행동은 정주라는 슬로건을 버리고 일시적인 점거행위occupation를 벌이며 이를 (가능한 한) 확대/연쇄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거리는, 거리의 민중은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후 월스트리트 점거로 시작된 오큐파이 운동은 이러한 새로운 경향이 전면적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오큐파이 운동 이전에 오큐파이가 새로운 행동의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한 이 책의 정확한, 그렇기에 예언적일 수 있었던 통찰력을 보여준다.

도시를 둘러싼 대립이 메트로폴리스와 메가슬럼의 대립으로 변화된 새로운 조건에서 코소는 민중 자신이 도시적인 존재를 넘어서 ‘간도시적인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비어 가는 건축물들의 시각적 대상들로 채워진 도시, 거리마저 점차 축소되고 있는 도시에 대해, 민중들은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상이한 운동들 간의 연대와 결연을 통해 도시들 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간도시적이고 간운동적인 새로운 종류의 정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사이에서 진행되는 이 ‘간도시적 운동’은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 도시와는 다른 공간을 형성하는 운동’이지만, 그것은 사실 새로운 방식으로 ‘도시를 형성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코소가 보기에 도시란 건축물의 집합이기 이전에, 사람들의 집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런 집적 속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관계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사건들의 집합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도시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도시가 형성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출현할 것인가?

하지만 코소는 여기서 대립·항쟁의 모델보다는 절충, 협조, 심지어 야합마저도 불사하는 ‘얽힘의 모델’이 새로운 이 도시의 운동에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명한 대립과 항쟁, 그것을 통해 획득되는 새로운 통제의 권력이 사실은 낡은 것을 반복하여 끌어들이기 마련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도시라는 것 자체가 언제나 누각과 거리가 대립하긴 하지만 누각 없이 거리만 있는 도시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서로 상반되는 힘과 에너지가 얽히고설켜 만들어지는 게 도시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얽힘을 위해 그가 생각하는 방향은 우디 거스리의 유명한 노래에서 따온 ‘이 땅은 너의 땅’이란 슬로건이다. ‘이 땅은 나의 땅’이란 관념이 거리의 민중을 쫓아냈지만, 또 다시 반대자들을 쫓아내는 것 역시 ‘이 땅은 나의 땅’임을 선언하는 것이란 점에서 역설적인 동일성을 가짐을 안다면, 땅과 소유자의 관계를 교착시키고 뒤섞는 저 슬로건이 사실은 더욱 발본적인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이해하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 뉴욕, 아니 미국은 이른바 ‘인디언’으로 불리는 선주민들의 땅이고, 거기에 새로운 삶의 꿈을 안고 도착한 유럽 이민자들의 땅이며,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의 땅이고, 아메리칸 드림에 홀려 흘러들어온 아시아인이나 히스패닉의 땅인 것이다. 모두의 땅, 그렇기에 누구의 땅도 아닌 그런 땅,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도시의 대지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제 지구 자체를 향해 나아간다. 모든 인간, 모든 생물의 ‘공통재산’인 지구, 상호의존적인 공생의 대지, 어느 인간, 어느 생명체보다 선행하지만 그 모두를 받아들여 살게 해 준 ‘기관 없는 신체’ 지구, 그러나 ‘자기 가족과 자기 종의 번영에 지나친 책임감을 짊어지고 그걸 위해서라면 타자의 파괴조차 주저하지 않는 초남성적 우두머리’들에 의해 파괴되며 전지구적 젠트리피케이션 과정 속으로 몰려가고 있는 지구가 도시와 민중을 거쳐 코소가 새로이 주목하게 된 대상이다. 여기에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고향의 넓은 바다가, 그 바다를 연상하게 했던 잭슨 폴록의 그림이 들어가 앉아 있을 것이다. 도쿄의 지속을 위해선 일본 열도 전체의 3배의 땅이 필요하다는 생태학적 사고도, 결국 지구상의 도시들이 지속하려면 여러 개의 지구가 필요하리라는 한계의 사유도 들어가 앉아 있을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로 끔직한 재앙의 현행성을 보여주었던 3·11 이후의 후쿠시마 또한 들어가 앉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 한계를 넘어서 성장해 버린 인간세계의 난감한 미래를 통해, 단지 자연적 생태계의 보존을 꿈꾸는 자연생태학이 아니라,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로 딱딱하게 굳어져 가며 죽어가는 거대도시의 운명적인 힘 사이에서, 그 틈새에 스며들어 틈새를 벌리며 확장되는 액체적인 민중의 힘과 그 힘으로 가동될 새로운 도시생태학을 불러내고 싶은 것일 게다. 이렇게 그는 그가 떠난 영토로 다시 되돌아갈 것이고,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떠난 대지로 다시 되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거리는 반복하여 다시 도시 안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지구라는 거대한 신체를 안고.


1. [한국어판] 렘 쿨하스, 『정신착란병의 뉴욕』, 김원갑 옮김, 태림문화사, 1999. [¹]
2. [옮긴이] 기 드보르(Guy Debord)는 스펙터클을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라고 규정하며,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활동이 수동적으로 흡수되고, 상품이 삶을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그를 비롯한 상황주의자들의 사상과 운동은 68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반자본주의사상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²]
3. [옮긴이]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안또니오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맑스주의자들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공통 개념(라틴어 notio communis, 영어 common notion)을 건져내 발전시킨 것으로서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회적 공유지 the commons와 그것에 연관된 재화는 물론, 우리가 사회관계 속에서 창조해 내는 정보, 통신, 정동, 관계 들이 공통의 부임을 드러내고 있다. 공통적인 것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는 피터 라인보우의 『마그나카르타 선언』(정남영 옮김, 갈무리, 2012)을, 오늘날의 사회운동과 공통적인 것의 잠재력에 관해서는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갈무리, 2011), 안또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의 『선언』(조정환 옮김, 갈무리, 2012)을 참조하라. [³]
4. [한국어판] 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유강은 옮김, 그린비, 2010. [⁴]



2013년 4월 5일
수유너머 위클리
이진경

기사 원문 링크 : http://suyunomo.net/?p=1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