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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다 2019.5.3] 문학에서 삶으로, 그 도약의 기록들 / 한영인 문학평론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ko&ps_boid=220


1


비평을 읽는 일이 점점 귀해지고 있다. 귀하다는 말은 대개 소중하다는 뜻과 나란하지만 여기서는 그저 드물다는 뜻이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비평 지면의 감소 추이나 비평집 출간 빈도 등을 따져 볼 수도 있겠으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비평의 위축을 단지 변화하는 문학 제도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비평에 자리를 내어주는 데 소극적인 지금의 문학 제도는 비평의 위축을 불러온 원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결과에 가까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학 비평이 놓인 곤궁한 처지를 고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닌 만큼 관련해서 길게 이야기를 할 계제는 아니지만 오늘날 비평의 위축이 비평가들이 더 이상 문학의 가치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확고하게 믿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된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정치인과 그렇지 않은 정치인의 태도가 다르듯 문학이 여전히 우리 삶에 위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 비평가와 거기에 회의적인 비평가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정치인이 세상을 하나도 못 바꿀 수도 있으며 그렇게 믿지 않는 냉소적인 정치인이 어쩌다 세계를 커다랗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문학에 회의적인 비평가가 그 특유의 거리감을 바탕으로 예리하고 설득력 있는 논고를 제출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비판적 거리감은 비평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물론 비평의 필요/충분조건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기에 시대의 상황에 따라 그 세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비평을 비평답게 추동하는 충분조건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스캔들’로서의 문학을 넘어 삶과 접속하는 문학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아닐까.


김대성의 『대피소의 문학』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그래서였다. 그의 글에는 행간마다 문학의 가치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신뢰하고 그 문학이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망에 대한 실험에 투신하는 믿음이 빼곡하다. 문학 평론가가 문학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하냐는 물음에는 문학에 대한 믿음이―그것이 무엇이든―무반성적인 문학주의와 곧잘 등치되곤 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믿음을 표방한다는 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답하겠다. 문학에 대해 김대성이 드러내는 곡진함은 현재 우리가 한국 문학 비평장에서 드물기에 주목해 봐야 하는 하나의 표정임에 분명하다.


2


“없앨 수도 없고 기왕의 쓸모를 회복할 수도 없는 텅 빈 건물의 불침번을 서는 행위에서 문학의 곤궁한 지위를 떠올리게 된다.”
―김대성, 「서문」, 『대피소의 문학』, 갈무리, 2019, 8쪽.


문학의 곤궁한 처지는 그 역시 동시대 비평가들과 공유하는 객관적 조건이다. 텅 빈 건물의 불침번을 서는 일은 현실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무용한 일로 비추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신뢰는 바로 그 사회적 무용성에 대한 투신(投信)이기도 하다. 그는 위의 문장에 이렇게 덧붙인다. “오늘의 한국문학, 그 성(城)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이들 중에 아무도 없는 건물의 문을 두드리는 관리인과 같은 이들이 있다. 텅 빈 건물에 머물며 매일 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쓸모를 잃어버린 대상의 쓸모를 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문’이 ‘관’으로 침몰하는 것을 붙들어두는 이 행위로 상실되었던 문의 기능, 그 잠재적인 역량이 지켜진다. (중략) 어떤 작가들에겐 ‘문학을 한다는 것’이 텅 빈 건물의 ‘문을 두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할 테다.” 텅 빈 건물을 돌며 문을 두드리는 무용한 행위가 잃어버린 대상의 쓸모를 깨우는 일이라면 얼핏 무용해 보이는 문학의 힘은 재난이 일상이 된 삶 속에 가라앉은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손짓에서 나오는 것일 터, 김대성에게 문학은 그와 같은 부름과 응답의 내밀한 관계의 형태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문학을 받아 안는 자들이 선 곳은 왜 하필 ‘성의 주변’인가. 왜 그는 글의 시작에서부터 이토록 완강한 ‘주변부적 자의식’을 드러내는가. 그건 주변이 그저 퇴락한 결여의 공간이 아니라 중심을 비판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이와 같은 관점은 1970년대 말 제3세계 문학론이 제출된 이후 진보적 한국 문학 담론의 주요한 논리였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문학(비평) 자체가 이미 한계에 내몰린 주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문학-비평을 한다는 건 소외받은 상황 속에서 부당하게 가치 있는 것을 소외시키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주변성의 감각을 잃고 중심의 축조에 골몰하는 순간 문학은 그 추락을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김대성의 글은 중력을 거슬러 다시 비행하고자 하는 이카루스의 날개짓을 닮아 있다.


3


김대성은 이중의 주변성을 고스란히 체현하면서 우리 시대 문학을 읽는 하나의 방식을 제안한다. 그가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을 통해 “목숨을 걸고 높은 곳에 올라 구조 요청을 했던 이가 물에 잠긴 오늘의 세상에서 구조 요청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점을 짚어 내거나 르포 문학을 살피는 지면에서 ‘조망하는 자리’와 ‘현장의 당면한 자리’의 낙차를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참사의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이곳의 글쓰기임을 강조할 때, 또 김이설의 비극적인 작품에서 “이야기란 바닥으로 침몰하는 인간이 대면해야만 하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전유’하고 ‘공유’해온 오래된 양식”임을 새삼 일깨우고 이주란의 소설에서 “문제 해결 능력의 부재나 만성적인 무기력 상태에 빠진 청년 세대만을 떠올리는 건 생산적인 관점이 되지 못”한다며 이를 “서사화하기 어려운 존재와 대상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시도이자 위계나 중심이 없는 글쓰기 양식에 대한 모색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온당하게 지적할 때, 우리는 그가 작품의 작품됨을 그 자체로 존중할 줄 아는 보기 드문 미덕을 지닌 비평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대성은 문학을 부름으로 파악하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독자-비평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 부름이 곧 소명이라고 할 때 문학은 그의 소명이며 그는 개별 작품들에 자기 나름대로 충실하게 응답하면서 소명을 지켜 나간다. “서두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응답을 발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없는 이름을 부르는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딛고 서 있는 이곳을 거듭 지각하는 일이라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올라타 있는 거인의 이름은 아마도 ‘책임’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김대성의 이 책의 많은 구절들은 다분히 의무론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미증유의 참사 속에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해야 한다는 그의 윤리적 태도의 소산일 것이다.


나는 앞서 김대성이 이중의 주변부(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한국 문학 현장에 대한 냉철한 스케치인 2부에 실린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신경숙 표절 사태 당시 발표된 글인 「한국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넘어」라는 글의 도입부에서 그는 논점의 방향을 조금 바꿔 “이슈를 체감하는 발화 위치의 상이함에서 연유하는 온도 차이”를 드러내겠다고 말한다. 이는 신경숙의 표절을 비난하거나 문학권력론이라는 “동어반복적” 비판을 넘어 “한국문학의 종말이나 끝장을 서둘러 선고해버리는 목소리”에 느낀 “위화감”을 피력하는, 지금도 그렇고 당시로서도 독특한 포지션에 스스로 서고자 한 글이다. 나는 앞서 김대성이 문학의 가치에 대한 곡진한 믿음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드문 비평가라고 했는데 이런 대목에서도 그 점은 여실히 확인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 붕괴나 해체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끝났다고, 이미 끝장난 것이었다고, 그렇게 끝내버려도 되는가. 망해버렸다고 선고해도 되는가. 한국문학에 대한 절망적인 선고가 고지되는 방식의 독점성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끝장났다’는 선고는 조금 더 힘겹게, 할 수 있는 만큼 애쓰며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중략) 그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문학의 끝장을 향해 내달릴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우치다 타츠루의 정의에 따르면 김대성은 어른이다. 그는 ‘후속 비평가’의 입장에서 ‘사오십대 중진 비평가들’을 향해 발화하고 있지만 진짜 어른은 ‘중진’이 아닌 김대성인 것이다. 왜 그런가.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아무리 잘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도 지속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일정 수의 ‘어른’이 필요하다. 이때 어른은 시스템이 망가졌을 때 호들갑을 떨며 남에게 수리를 미루는 사람이 아니라 이 시스템의 보전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며 선뜻 그 수리를 떠맡는 사람이다. ‘이 시스템은 내 것이 아니니까 파산하거나 없어져버려도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따라서 어른이 아니며 시스템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태를 나아지게 하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국 문학이 여전히 모두를 위한 자산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문학이 끝장났다거나 망해버렸다고 쉽게 손을 터는 사람과 다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문학-현장을 단순히 옹호할 거라는 예상은 유치하다. 그렇기 때문에 외려 더욱 날카롭고 곡진한 비판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행하는 ‘주니어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그렇다.


비판의 핵심은 “주니어 시스템 아래에서 자율적인 비평 활동이 가능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선택받은 ‘주니어’는 내부를 비판할 수 없으며 해당 단체나 집단의 논의 구조에 반하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김대성은 “이러한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주니어 시스템 속에서 젊은 비평가들은 ‘부품’처럼 남김없이 활용되면서 거덜 난다. 주니어 시스템은 오직 두 가지 길만을 허락하는 듯하다. 조로하거나 추방당하는 것. 주니어 시스템 아래에선 바깥을 상상하거나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반경을 구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동료를 가질 수 있는 구조까지 모짝 거덜 난다는 것은 문단 시스템이 ‘다단계’ 구조와 닮았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실로 뼈아픈 진단이다. 이 진단이 더욱 뼈저린 것은 그 자신이 이 시스템의 일부이자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시 전문 계간지 『신생』의 편집위원이었다가 강제로 편집위원 권한을 박탈당한 개인적인 사건은 아마도 ‘조로하거나 추방당하는’ 주니어의 처지를 강력하게 체감하게 한 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과연 김대성 개인의 일일 뿐인가. 나는, 나를 비롯한 주변의 젊은 비평가들은 과연 이 구조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결국 ‘자율적인 비평’이라는 지향 아래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한때 양대 계간지로 불렸던 ‘창비’나 ‘문지’는 한때 모두 ‘주니어’들이 만든 것이었다.(당대의 ‘시니어’는 단연 추천제로 등단의 고삐를 틀어 쥔 ‘현대문학’이었다.) 만약 창비나 문지의 편집위원-동인들이 추천권을 손에 쥔 현대문학-문협파 문인들의 ‘주니어’가 되는 데 만족했다면 오늘날 한국문학의 모습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 새로운 주니어들의 반란은 가능할까. 이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된다 안 된다를 떠나 그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현재 한국 문학을 규정짓고 있는 체제성에 대한 성격이 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언제 한 번 이 질문에 답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보다 더 본격적인 연구나 응답이 필요하다 생각된다.)


「‘쪽글’의 생태학-비평가의 시민권」도 무척 흥미로운 글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 “위협 앞에서 생존을 위해 제 덩치를 부풀리는 야생 동물처럼 청탁 원고 속의 비평가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크 업이 되어 있다. 부지런히 많은 책을 섭렵하는 것이 무슨 죄이겠냐마는 당대의 비평 속에서 쉽게 확인되는 ‘이론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내가 감지하는 것은 ‘지적 허영’이 아닌 ‘생존에 대한 공포’의 감각이다. (중략) 숱한 이론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위용을 자랑하는 비평가들의 글에서 나는 부풀대로 부풀어오른 ‘근육’을 보게 된다. 파열 직전의 그 근육들에서 이론이라는 스테로이드를 끊을 수 없는 ‘생존에 대한 공포’를 읽는다. 신체 밸런스와 전혀 맞지 않는 거대한 근육이나 시종일관 전력 질주하는 강박증에서 젊은 비평가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태환경을 감각해볼 수 있다.” 나는 일각의 ‘이론 남용’에 대해 이보다 더 적확하면서도 가슴 아픈 묘사를 본 적이 없다. 지적 허영이 실은 생존의 공포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론들이 자신의 논지를 ‘블러핑’하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온당한 회의감은 하지만 그런 이들을 조롱하거나 탓하는 데 쓰이지 않고 그들이 놓인 생태계를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시선의 전환은 값진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자신의 체험담은 착잡한 마음 없이 읽기 힘든 것인데 오늘 날 젊은 비평가들의 자의식을 살피고 싶다면 제일 먼저 찾아 읽어야 할 글이기도 하다. 조영일 같은 사람은 대학 교수가 된 비평가들은 거의 평론을 쓰지 않는다면서 비평을 교수가 되기 위한 스펙쯤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 문학에 여전히 붙박인 비평가의 각오는 그런 세속의 조롱과 무관하다. “비평가는 성으로 들어가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제 덩치를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하수구 검침원인 소하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일상과 생활 속에서 단련된 몸으로 ‘어둠의 길’을 안내하거나 혹은 길을 내어주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비평가의 시민권이란, 문학성에 입장하기 위한 것이거나 그곳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서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하수구’, 그 어둠의 조건을 자신의 생활과 몸으로 익히고 제 호흡으로 한발 한발 나아갈 수 있을 때만 획득될 수 있다.”


4


책의 3부는 “그 어둠의 조건을 자신의 생활과 몸으로 익히고 제 호흡으로 한발 한발” 나아간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김대성은 2013년부터 부산에서 생활예술모임 <곳간>을 운영하며 ‘문학의 곳간’이라는 정기 프로그램을 열고 있다. ‘생활’과 예술‘이라는, 현실에서 서로 다른 척력으로 작용하는 두 힘을 하나로 묶는 것은 다름 아닌 ’모임‘이라는 형식이다. 타자와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서 문학이 그 잠재적 역량을 실현할 수 있다는 김대성의 생각과 뜻하지 않게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삶의 이력이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경유해 자신의 생활과 삶을 이”어나가는 장면에 대한 스케치는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혹은 문단 문학 내부로 한정해 놓았던 협소했던 문학의 역량이 삶에서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문학의 지위가 바닥에 떨어져 한낱 신문지 조각처럼 바닥에 뒹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이, 또 ‘이야기하는 존재’의 지위가 그만큼 추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지하고 응원하는 작품이나 작가가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데 그 앞자리에 누군가의 말을 세심하게 듣고 살필 수 있는 영역을 지켜가는 일의 중요성을 놓아둘 수 있겠다. 얼핏 하찮아 보이는 말이 귀하고 드문 말로 변하는 것을 ‘문학적 순간’이라 불러도 좋다면 이 경험 또한 ‘문학의 곁’에서 수확할 수 있는 열매라 하겠다.”
―김대성, 「세상의 모든 곳간(들)」, 『대피소의 문학』, 229~230쪽.


김대성의 문학은 결코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며 삶은 온통 잠재적인 문학적 순간으로 충만해 있다. 문제는 이 잠재성을 실현시킬 역량인데 이는 작가나 비평가 같은 특수한 엘리트들의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 서로가 서로의 삶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우리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우정과 연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을 경유로 한 그 경험들이 다른 계기들보다 특별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야기의 힘이 삶을 추동하는 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피터 브룩스는 “인간 주체란 다름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창조한 여러 허구 사이의 교차점에 위치한 존재”(『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허구들(fictions)이야말로 문학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김대성의 문학-실험은 동시에 삶-실험과 접속한다. 문학을 삶과 접속시키려는 시도는 언제나 도약과 비약 그리고 추락 사이를 왕복했다. 그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된 교훈이 있다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 그 낮은 자리에 끝내 머물 때 최고의 도약의 성취된다는 것이다. 김대성의 문학-실험은 그 낮은 자리, 현장의 자리에 곧게 서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새 책을 손에 쥐자마자 그가 쓸 글들을 먼저 기다리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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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의 문학』 | 김대성 지음 | 갈무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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