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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또노미아』를 읽고

한병준(자율평론/동국대 대학원 철학과)

웹저널『자율평론』6호, 2003년 9월 30일

1995년 겨울에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전태일에 대한 영화를 보러 갔었다. 물론 이 영화는 감동적이었고 의미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나에게는 분명 어딘가 빈구석을 발견하게끔 만들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오던 중 어떤 사람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구호를 듣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 행위를 하던 사람이 어두운 저녁에 종로 한복판에서 외치던 구호가 그 영화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그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느꼈고 그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정치적 투쟁심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한없이 나약해 보였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운동을 하던 사람이거나 지금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족 내지는 반성의 의미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때 내가 그 사건에 대해 느낀 심정이다.

하지만 그는 왜 하필 그 영화라는 매개물에 의해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을까. 그는 오히려 그 매개물 없이는 자신의 입장을 도출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한 억압의 분노를 단지 어떤 매개물에 의존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영화라는 것을 확장시켜본다면 또다시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분노를 표출할 창구는 ‘노조’ 혹은 ‘당’일뿐인가? 그리고 국민의 정서를 대변해줄 수 있는 장치는 오로지 ‘국가’만이 가능 한 것인가? 그렇다면 개체들의 서로 상이한 욕망들은 어떤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좀더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이것이 어떤 하나의 덩어리로 묶여질 수 있는 욕망인가? 그 (좋았던) 시절에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이들은 과연 자신의 진정한 욕망의 분출로서 자신의 실천을 결부시켰을까? 그렇지 않으면 ‘민족’과 ‘국가’의 미래(혹은 ‘계급’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비교적 정치적인 욕망에 성공한 이들은 분명 ‘~당’에 소속되었을 것이고,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통일시킨 이들은 노조의 깃발아래에 하나의 관료로 나타날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이 거대한 자본주의적 체계 안에서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염원하는 소시민으로의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와 당신의 삶 속에서 각자의 욕망을 대신할 매개물들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아니 그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니까. 우리는 사회 안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이렇게 매개물을 통한 인간들의 투쟁은 진정한 인간의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히 해방이란 것은 매개물로 다시 권력이 환원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자율주의는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을 제공해준다. 즉 매개물에 대한 의존이 아닌 인간 스스로의 해방으로서 말이다. 매개물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이 제 기능을 다 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해방의 차원에서는 소멸을 말할 수 없다. 즉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하나의 이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율주의는 인간 스스로의 해방의 차원을 강조한다. 또한 그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의 어떠한 신비화에도 거부하는 것이다.

과거 자본주의에 반대하던 투쟁이 자본주의적 권력 구조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에 대비하여, 자율주의는 날이 갈수록 무정형의 상품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자본권력을 포착하게 하고 그것을 일상 속에서도 격렬히 투쟁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자율주의 운동은 적어도 과거의 좌파 운동이 보여준 권력으로의 환원이라는 모습들을 감안한다면 훨씬 급진적인 운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권력은 거대한 전선으로 획일화된 해방운동으로 맞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분자적인 일상의 모습에서, 삶의 궤적 안에서 나타나는 자본의 억압을 꿰뚫어 내는 운동인 것이다. 이것은 노동거부로 또한 자본으로 환원되는 모든 가치의 형태를 거부하는 자기가치의 형태로, 그리고 권력이 아닌 활력으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 안에서 저항의 운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매개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이 매개물은 지구를 모두 지배하고 있는 자본 안에서 오히려 자신의 영토만을 재생산해낼 뿐이다.

집합적인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투쟁의 동력을 만들어주지만 그 외의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나는 어디 소속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있고 난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 이외의 다른 조류들은 이 공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흔한 이야기이자 일종의 근본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것은 그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가능성을 닫아놓는 문제로 전개된다. 이것은 연대를 통한 활동과도 거리가 멀다. 즉 전 지구적인 권력에 맞서는 저항 운동이 갖고 있는 유일한 힘의 근원인 연대의 문제는 이 집합적 덩어리 안에서 소멸되고 또 다른 양상의 권력을 형성한다. 그러나 권력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그 권력은 모든 것을 흡수하고도 “실제로는 위기에 시달린다.” 권력은 따라서 종류별로 상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견고해 보이는 외관만큼이나 무차별적이다. 즉 이러한 저항운동의 영토의 재생산은 여타의 저항운동을 배제 혹은 흡수한다는 점에서 자본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다른 양상의 저항운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제국주의적 주권과 제국적 주권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모습들 속에서 저항운동이 갖는 사고의 전환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제국주의적 주권의 위기는 “다중의 욕구와 협력의 내재적 힘들의 지평과, 이 힘들을 봉쇄하고 그것들에 질서를 부과하고자 하는 초월적 권위 사이의 지속적 갈등”이라면 제국적 주권의 위기는 “하나의 갈등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미시갈등들(붙들기 어렵고, 증식하며, 비장소적인 갈등들)의 유연한 네트워크”를 통해 촉발된다. 이는 일상 곳곳에 침투한 자본의 억압들만큼이나 그 위기가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수자의 문제는 자본이 도저히 봉합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이다. 즉 미시갈등의 근원은 소수자에게서 나타난다. 양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오로지 삶의 차원에서 질적인 의미로 억압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소수자의 문제는 자본이 봉합할 수 없는 만큼이나 어떠한 단일한 투쟁물로도 조직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소수자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다. 수직적 구조의 연대는 이 소수자들을 또 다른 양상의 소수자로 몰락시키지만 수평적인 연대는 소수자들의 능동성을 증대시킨다. 여성, 동성애자,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등의 문제는 따라서 그들을 조직으로 묶어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스로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능동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제국의 흐름은 그 거대해진 덩치만큼이나 섬세하지 못하다. 곳곳에서 자신의 균열을 담지하고 있다. 이는 어떤 도덕적인 문제에 의한 균열이 아니다. 아니 전적으로 여기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지금 인간들이 발딛고 있는 곳이 지구라면 그리고 우리를 지배하는 현실을 초월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부도덕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인간을 어떠한 권력으로 종속시키고 가두어버리는, 그래서 모든 인간을 죄수로 만들어버리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균열은 바로 현실 그 자체로서 파악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그런 것들 안에서 투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당연히 저항운동의 토대이자 가능성이다. 따라서 현실은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이야말로 자율적인 인간의 운동이다. 따라서 현실 자본의 무한한 권력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는 그 현실을 우리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면 된다. 그것은 부정으로의 폐절이 아니라 긍정으로의 생성이다. 이것이 활력이고 권력에 대항한 유일한 대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우또노미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이 책에서 네그리를 보고 있지만 사실 네그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의 삶의 궤적이 갖는 다양한 모습은 우리에게 일종의 귀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이 책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 “자율은 영원하다.” 이 이야기를 도출하기 위한 수많은 서술들은 바로 자율적 운동을 위한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해석과 그것에 대한 대안이다. 그리고 그 서술의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준다. 또 다른 운동의 지평이자 가능성의 개방은 이러한 대안들을 경유하는 과정이지 그 대안을 결과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나오는 개념들은 과거의 혁명 이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떠한 강요도 내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만큼 가능성을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지도 않는다.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과거 좌파들의 장대한 프로젝트는 따라서 여기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다. 그리고 배타적이고도 종합적인 단절과 흡수의 논리는 이 책 안에서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유물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잘 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과거로 회귀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거가 지금 우리에게 억압적 현실로 나타난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인 자율적 주체들의 다양한 운동이 과거의 언어인 ‘몰계급적 운동’이라는 비난을 들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난은 오히려 정치적 운동의 효율성을 위해 부르주아와 연합하고자 했던 과거의 좌파정당에게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대안을 걱정한 나머지 그들의 효율성을 찾았을 뿐이다.

자율적 주체는 그러한 연합을 거부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현실태이자 어떠한 환원도 거부하는 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자율적 주체를 기반으로 하는 자율주의는 “결코 특정한 사상의 조류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주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삶을 운영하려는 다중의 자치적 노력을 지시한다.” 이는 다시 말해 이 책이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 주고 그 대안으로 또 다시 사람들에게 환상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치적 노력에 대한 발상의 전환으로 그리고 환원 불가능한 투쟁의 지속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정된 미래의 세계는 인간의 현실만큼이나 불행한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꿀보다 달콤할 지라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그 만큼 억압된 것일 수밖에 없다. 또한 너무나도 당연한 말, 미래는 현실을 토대로 구성되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미래는 규정적일 수도 그리고 어떤 끝 지점으로의 도착을 의미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을 할 수 있는 힘은 어떤 하나의 절대적 힘이 아니라 다양한 힘들의 연합이다. 그리고 이 힘들은 기존의 힘이 갖고 있었던 능력들과는 다른 무엇이지 그 힘에 의지하는 힘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러한 활력적 사유를 제공하며 지금의 세계와 이미 제시되었던 혁명의 담론을 갱신하도록 조력한다. 이 책은 따라서 이 책으로 어떠한 대안이 결정되기를 거부하는 개방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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