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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문)



‘공통적인 것’의 수탈과 대항권력의 구축

[새책]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과 제국>


| 이성혁 (문학평론가) 


안토니오 네그리의 강의록인 <다중과 제국>이 갈무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작년에 출간된 강연집인 <네그리의 제국강의>와 함께, 네그리의 탈근대 정치철학을 네그리 자신의 입으로 해설하는 성격의 저작물이다. <네그리의 제국강의>의 원서가 2006년에 출간되었고, <다중과 제국>의 원서가 2002년에 출간되었음을 보면, 전자가 <다중> 출간 이후의 네그리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는 <제국>과 <다중> 사이에 진행된 네그리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네그리 자신의 사유 방법론을 육성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제국>과 <다중>에로 흡수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비교적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과 연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네그리의 제국강의>보다는 이 책이 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 인내를 갖고 읽어내면, 이 책에는 네그리의 정치사상이 요령 있게 압축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특히 ‘촛불’ 시위 이후, 한국에서 네그리의 ‘다중’ 이론은 주목을 받아 왔다. 시위에 참가한 각자가 스스로 미디어가 되고 그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전개된 ‘촛불’의 새로운 운동 양태는, 올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모든 운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알다시피 올해 봄, 튀니지를 시발점으로 하여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벌어진 시위는 수십 년 동안 굳건했던 독재 체제들을 붕괴시켰다. 그 붕괴를 이끌었던 운동은 전통적인 운동 조직이 중심이 되었다기보다는 SNS를 활용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가을-점령 운동으로 붉게 물든-역시 아프리카의 봄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전 세계의 반신자유주의 시위는,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지만 곧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라를 통째로 뒤흔들면서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학생을 비롯하여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거나 실업자들이다. 이들은 특정한 지도부 없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운동을 거대하게 진화시킨다. 혹자는 이러한 운동 양태에 대해, 운동의 구심점이 없어서 결국 장작이 타오르다 꺼지듯 별 성과 없이 스러질 것이라고도 비판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조직이 현 시기의 운동을 지도할 수는 없으며 다만 전체 운동의 한 지류로서 참가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운동이 저렇게 진행되어가는 경향성을 파악하고 그 가능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네그리의 ‘다중’ 이론은 이를 인식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제시한다. <다중과 제국>에서 우리는 그 개념들에 대한 간명한 설명을 제공받을 수 있다. <다중과 제국>은 다섯 번의 강의와 한 편의 대담, 그리고 강의와 연관된 내용을 담은 여섯 편의 소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섯 강의는 1) 시기구분과 관련하여 ‘제국’ 시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 2)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삶정치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에 입각한 설명, 3) 정치적 주체로서의 다중과 대항권력의 구축에 대한 설명, 4) ‘제국’ 시기 주권의 다중에 대한 공격으로서의 전쟁과 주체성의 생산에 대한 설명, 5) 전투적 실천으로서의 탐구 방법론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도 이러한 구성은 네그리의 사회 철학적 사유의 뼈대에 맞추어 이루어진 것일 테다. 그렇다면 네그리 사회 철학의 뼈대는, 탈근대에 도달한 현 사회를 계보학적으로 설명하고 노동과 적대의 변화된 양상을 중심으로 현 사회의 사회적 존재론을 탐구하며 이로부터 저항과 혁명의 잠재성과 가능성 및 전쟁의 양상을 조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유 구도는 네그리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맑스를 좇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네그리에 따르면 맑스 존재론의 두 가지 전제는 “세계가 노동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것”이며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노동은 언제나 착취된다는 것”인데, 그는 이에 따라 “우리는 한편으로는 세계를 구축하는 노동력을 분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착취로부터 노동을 해방시킬 가능성을 분석해야”(105)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이렇듯 네그리 자신의 사유와 맑스와 레닌의 사유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맑스의 고전적인 정식-토대/상부구조론이나 노동가치이론-에 대해서 네그리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삶정치적 적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시대에는 유지되기 힘든 정식이라고 보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는 다닐로 졸로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맑스주의의 회복과 그 혁신, “마키아벨리적 의미의 ‘원리로의 회귀’”(27)를 추구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또한 그는 레닌의 ‘전위당’ 이론이나 ‘약한 고리론’ 역시 다중과 제국의 시대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지만, 한편으로 레닌주의를 재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레닌이 시도한 카이로스, 그 혁명적 결정을 “다른 구성 도식에 근거”(227)하여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구성적 결정은 바로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와 상응한다. 

이를 보면, 네그리는 맑스와 레닌의 혁명적 사상을 계승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철저하게 반교조적인 방식에 의해서다. 네그리는, “우리가 맑스의 가르침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맑스적 전략은 새롭고 창조적인 실험에, 그리고 우리가 분석하는 상황의 고유성에 대한 감각에 종속된다.”(17)이라고 말한다. “진리는 구체적인 것”이라는 레닌의 명제에 따라 그는 변화된 현실의 구체성과 그 경향성을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네그리는, 지금과는 다른 시대적 조건 속에서 그 시대를 파악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맑스와 레닌의 몇 가지 개념들을 변형시키거나 폐기하고, 새로운 개념을 생산한다. 네그리에게 ‘맑스주의’는 맑스나 레닌의 저작으로부터 가져온 개념들의 뭉치를 의미하지 않고, 혁명적 관점으로 자본과 시대에 대해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인식을 위해 네그리는 “연구에서 실천이 헤게모니와 중심성을 가진다”(238)고 말한다. 그래서 네그리의 제국 이론이 저항하는 주체들의 능동성을 분석에서 중시하지 않고 일종의 ‘객관적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다(존 홀러웨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는 평가는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그리는 그와는 반대로, 주체화 장치에 대해 저항하는 주체의 능동적인 실천을 바탕으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네그리에게서 이를 위한 실천과 인식은 ‘공통적인 것’의 능동적인 구축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긍정만이 생산의 흐름을 안으로부터 방향지울 수 있게 해주고 앎과 자유를 재구성하는 흐름을 자본주의적인 소외의 흐름과 구별하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공통적 실천의 중심성을 재긍정할 수 있는, 실천적 단절에 의해 해결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만 우리는 복잡한 연구에 방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적대의 형태들을 부각시킬 수 있는데, 이 적대의 형태들은 공통적인 것의 구축 과정에서 앎과 행동이 가지는 전투성과 양자가 합류하는 새로운 형상들을 통해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방법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실천적 물질적 결정, 순전한 비판적 지평을 깨뜨리는 실천입니다. 실천적 단절이 언어와 협동을 가로질러야 하며, 공통적 실천-이는 이 과정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앎과 행동의 구체적 통일입니다-의 중심성에 대해 지속적 긍정이 언어와 협동을 가로질러야 합니다.(237) 

네그리에게서 자본과 주권의 권력이 먼저인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려는 다중의 욕망이 먼저이다. 적대는, 다중이 먼저 구축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하려는 자본 및 이를 위해 행사되는 주권 권력과 이에 대항하는 다중 사이에 형성된다. 그런데 네그리는 적대의 형태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투적인 앎과 행동이 “공통적인 것의 구축 과정”과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언어와 협동을 가로지르면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과정에 합류하는 것이면서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기에 물질적이고 실천적이다. 이는 “순전한 비판적 지평을 깨뜨리는 실천”이다. 이 진술은 네그리 자신의 이론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객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의 변화를 위한 주체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합류함을 통해서 구성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네그리는 이러한 이론 구성을 위해서는 “역사 과정에 방법을 몰입시켜야 할 필요가 있”(254)으며, “구성의 관점에서 존재를 철학적으로 인식”(106)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역사과정은 구조의 반복적인 변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대 속에서 끊임없이 내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어서, 이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은 구성되는 역사 과정의 실재에 몰입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네그리에 따르면 역사의 구성 과정은 사건에 의해 전개되기에, “방법은 사건에 종속”(235)된다. 이 때문에, “구체에서 추상으로” 상향한 후 “추상에서 구체로 하강”한다는 맑스의 방법론은 수정된다. 네그리에게서 앎은 추상에서 구체로 하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 아니라 구성 과정에 전투적으로 합류하여 성취하는 것이기에, “분석의 근본 영역”은 “생산적인 것과 생산된 것,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 구성적인 것과 구성된 것 사이”이며, 탐구 방법은 그 사이에서 “움직이게끔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270)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맑스처럼 “구체적으로 규정된 추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데, 이는 “(탈근대의 역사적 양식을 특징짓는) 예상치 못한 사건 및 출현으로 구성되는 계속적 요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널리 퍼져 있는 역사적 경험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필요”(253)하기 때문이다. ‘탈근대’의 역사적 양식이란, 제국 및 자본과 다중 사이의 적대에 따라 벌어지는 삶정치적인 사건을 통해 구성되고, 또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사회적 존재론이 그러한 구성을 뒷받침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제국’과 ‘다중’, 그리고 ‘비물질노동’의 개념에 대해서는 <네그리의 제국 강의>에 대한 필자의 서평인 "다중의 미소를 위하여"(<참세상>, 2011. 1. 24)에서 간략히 정리하였기에 이 글에서는 재론하지 않는다.) 

구조보다는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이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생성 과정에 주안점을 두는 이러한 방법에서는, “구조와 상부구조는 더 이상 수직축에서 분리된 것으로 제시되지 않”고 그 둘의 “관계가 평면적 지형에서 융합”되어 “서로 뒤얽히”(260)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그 방법은 “객관적 장치와 주체의 구성적 행위 사이의 관계”에서 “결정론적 인과적 과정”을 상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현 시대에서는 인과성이 “불시적인 연쇄의 성격을 점점 더 띠고 있다”(260)는 것을 인식하고자 한다. 즉 네그리의 이론은 전통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과 변증법적 인과론을 해체하고 재구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는 맑스의 핵심적 가르침인 “투쟁, 즉 자본 관계가 사회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모든 정치적 실재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것으로 남아있”(18)다고 말한다. 

네그리의 이론에서 중추가 되고 있는 개념인 ‘공통적인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역자 역시 말하고 있듯이 이 책에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공통체(Commonwealth, 2009)>의 번역 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추상적이나마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지 제시되고 있다. 네그리에 의하면, ‘공통적인 것’의 이해를 위해서는 “동일성 그리고/혹은 합의와 결부시키는 몇몇 전통적 독해들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153)하다. “동일성과 차이를 넘어선”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다중의 개념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다중은 특이성들의 총체인데, 사실 여기서 총체는 차이들의 공통성으로 간주되며, 특이성은 차이의 생산으로 인식”(153)된다는 말에 따라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공통적인 것’은 “창조적 활동들의 증식”이자 “다양한 연합적 관계들 혹은 형식들로 이해”(153)된다. 다양한 차이들이 창조적으로 생산되고 증식되면서 특이성들의 총체를 구성할 때, 그 차이들의 ‘공통적인 것’ 역시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증식된다. ‘공통적인 것’은 교집합이 아니고 결정되어 주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특이하게 생산되는 것이다. 

네그리는 ‘공통적인 것’의 구체적인 예로 ‘외부경제’와 ‘언어’를 들고 있다. 네그리는 현재 가치 생산은 “점점 더 직접적 생산과정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생산요소 및 사회적 부를 포획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생산요소 및 사회적 부인 ‘외부경제’란 “소비되지 않고 생산에서 더욱 확대되는 원료, 즉 사회적 협동의 총체”(266)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의 노동 방식 및 생산방식은 점점 언어에 기반을 두면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바로 “언어적으로 공통적인 것도 산 노동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풍부해진다”(267)고 한다. 그런데 “이제 자본주의는 결코 이러한 선행조건들(‘공통적인 것’-인용자)에 대해 값을 지불하지 않으며, 오히려 공적인 부분이 이에 대해 지불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항해서, 네그리는 “자본주의 경제의 조건을 미리 구성하는 문화, 문명, 지식, 전문적 능력 및 모든 생태적, 연합적, 도시적 조건들의 공통적 가치를”, 그것들이 “노동의 살아 있는 투사”(267)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네그리에 따르면, 가치 생산이 다중이 생산하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함으로써, 자본에 의한 착취는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전에 잉여가치 착취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필요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착취는 “공통적인 것의 파괴이자 협동의 수탈로서 나타”(262)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맑스에게서 방법의 정의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저 적대의 경험”을 새로운 조건을 배경으로 포착하는 것으로, 네그리는 맑스가 적대를 의미하는 “착취 및 분업”을 밝혀냈듯이, 오늘날의 “삶정치적 착취와 삶권력 안에서의 분업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262-263)고 주장한다. 자본의 삶정치적인 착취는 “직접적 생산과정 자체의 외부”에서 다중의 노동을 통해 생산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하는데, 그것은 국제적 분업의 과정, 즉 “생산 메커니즘과 점점 더 유기적인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하는 소속과 배제의 작동을 통해”(276) 다중을 통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네그리는 이러한 오늘날의 착취 방식에 대해 “존재로부터 살을 제거하는 것”(277)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하는데, 그 규정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다. 

가치 관계가 공통적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 발견된 후에는, 가치관계가 장소의 연쇄 안에 물질적으로 새겨져야 하며, 소유의 단일한 명령에 의해 통제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통제의 핵심은 언제나, 지속적인 명령 하에 있는 생산체제 안에서 협동을 파편화하여 위계적으로 분절시키거나 상호작용시키는 데 있다. 새로운 소통테크놀로지가 이러한 과정에서 근본적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독립적인 노동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적 조정을 극히 효율적으로 만들면서도 노동자들이 소유에 기초한 위계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277-278) 

여기서 ‘살’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메를로-뽕티에서 빌려온 ‘살’ 개념은, 네그리에 따르면 “신체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일치하고 또 구별불가능한 살아있는 공통적 실체”이며 “삶의 충만함을 향해 있”는 “순수한 잠재성, 삶의 무형적 질료, 존재의 원소”(138)다. 네그리는 “우리는 우리의 살로 지속적으로 삶형태를 만”(138-139)들며, “다중의 살은 일반지성의 신체로 변형”(170)한다고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다중이 구별불가능하게 혼종적으로 섞이면서 이루는 “살아 있는 공통적 실체”가 다중의 살이며, 그것은 삶의 충만함을 향해 삶형태-신체를 만들어나간다고 할 수 있다. 살이 충만함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이것이 관념론적인 목적론과는 무관한 유물론적인 텔로스다. 자본이 다중의 살을 도려낸다는 의미는, 일반지성의 신체로 변형되고 있는 다중의 공통적인 실체를 파괴한다는 것, 즉 노동자들을 다중으로부터 분리하고 분업 체계의 위계에 종속시킴으로써 “소유의 단일한 명령에 의해 통제”하여 소유의 위계에 재배치하거나 배제한다는 것,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협동을 파편화하고 분절시켜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전화시킴으로써 ‘공통적인 것’을 착취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현 시기 자본이 다중을 착취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는, 소위 산업예비군으로 인식되어 왔던 빈자 역시 자본의 착취 대상이다. “착취 기능이 협동 능력과 가치 창조 능력 이외에 호흡, 공간, 운동 또한 제거하는 것이라면, 빈자는 배제된 자일뿐만 아니라 또 착취의 전형적인 대상”(116)인 것이다. “오늘날가난이란 활동을 가치있게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한 단순한 사실을 나타낼 뿐”이라고 할 때, “가난한 이주민 혹은 배제된 사람도 역시 표현의 활력을 가진 사람”(116)이다. 이 진술에서 ‘가치’란 물론 자본주의의 교환가치를 의미한다. 빈자는 자본에 의해 그의 활동이 가치화되지 못했을 뿐이어서 자본주의의 고용 바깥에서 삶의 활력을 표현할 수 있으며 또 표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역시 다중의 살을 구성하는 존재로서, 삶권력에 의해 배제되고 도려내지며 착취당하고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네그리는 “빈자와 노동자는 함께 투쟁해야만”(116) 한다고 주장한다.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대기업에 고용된 육체노동자가 투쟁의 중심이라고 할 수 없는데, 불안전 고용 또는 실업상태에 놓인 빈자 역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주체로서 자본에 의해 수탈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강의하는 네그리 [출처: 갈무리 출판사]

그런데 다중을 “소유의 단일한 명령에 의해 통제”하기 위해서는 권력-삶권력-이 행사되어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네그리는 “오늘날 질서는 전쟁의 질서를 통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적 조장을 통해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 자체 삶권력의 형태”인 전쟁에서 “적은 지속적으로 구축되고 발명되어야 하며 역설적이게도 정복될 수는 없”는 것인데, “더 이상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제국에서 “전쟁은 언제나 내부적이” (194-195)된다는 것이다. 제국은 다중을 통제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적을 생산하면서 내전을 일으켜야 한다. 네그리는 이 과정에서 전쟁은 다른 국가와의 교전이라기보다는 치안의 성격을 띠게 되고, 그래서 탈근대적인 전쟁은 전쟁과 치안이 뒤섞이는 상태에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탈근대적 전쟁은 근대적 전쟁보다는 덜한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또 근대적 치안보다는 더한 어떤 것”(197)이 된다. 

네그리는 이렇듯 권력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일으키는 전쟁에 대한 대항은, “욕망에 대한 긍정이자 동시에 삶에 대한 긍정인, 그러한 저항을 실천”하는 것, “주체성의 생산에서 다중의 우위를 긍정하는 것으로만 주어질 수 있”(199-200)다고 주장한다. 푸꼬를 따라, 네그리는 오늘날 삶은 권력이 활동하는 장이 되었으며, 이를 맑스가 논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과 연결시킨다. 한편으로 그는 말년의 푸꼬가 주체성에 대해 사유하면서 삶권력과 삶정치의 구분을 제안하기 시작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네그리 역시 푸꼬를 따라 삶권력과 삶정치를 구분하면서, 이 두 개념을 “국가가 생산하는 특수한 테크놀로지에 대해 생각할 때 삶권력을 말하며, 저항의 복합체에 대해 생각할 때, 권력의 사회적 장치들이 충돌하는 경우들 및 그 정도에 대해 생각할 때 삶정치 혹은 삶정치적 맥락을 말”(113)한다고 규정한다. 네그리는 저항하는 주체성의 출현에 의해, “모든 방향에서 진행되는 해방 과정의 존재론적 열림에 대한 인식”(112)이 출현하면서 가시화된다고 하면서, 삶정치는 이러한 권력 투쟁이 전개되는 공간을 가리키며 “계급투쟁의 확장”(113)을 뜻한다고 의미화 한다. 

삶과 신체에 침투해 들어와서 삶을 주조하려는 권력의 테크놀로지에 맞서 신체가 저항하기 시작할 때, 삶정치의 공간은 열리기 시작한다. 말년의 푸꼬 역시 이러한 저항과 삶정치 개념을 사유하고 발전시켰다. 하지만 네그리는 푸꼬의 저항 개념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푸꼬의 작업은 “저항이 반란 및 구성권력과 맺는 내적 연관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저항이 강력한 정치적 무기일 수는 있지만, 고립된 개인적 저항 행위는 권력 구조를 변형시키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137)는 것. 네그리는 ‘저항’ 개념에서 더 나아가 ‘대항권력’ 개념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네그리는 대항권력은 저항, ‘반란’, ‘구성권력’으로 구성된다고 정리한다. 

1) 저항은 일상적 삶에서 대다수의 사회적 주체들이 실천하는 것으로, 시장에 맞서거나 권위에 맞서고, “사회적 소통에서 경험과 언어를 반복으로 틀어막고 그것을 무의미로 몰아대는 가치 및 체제에 맞서는 것”이다. “저항은 체험된 사회적 삶의 거의 모든 수준에서 명령과 엄혹하면서도 창조적으로 상호작용한다.”(203) “지속적으로 땅을 파는 것과 같은 어려운 작업”인 저항은 “사회적 공간의 모든 장소에서 명령의 총체를 구성하는 특이한 관계들 및 특이한 타협들/조작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206) 
2) 반란은 “대중적 저항운동이 짧은 시간에 활동적으로 되거나 혹은 어떤 구체적인 한정된 결정적 목표에 집중될 때 띠는 형태”로서, “저항의 다양한 형태들을 하나의 매듭으로 묶고 서로 상응하게” 하고 “그것들을 주어진 사회적 조직의, 구성된 권력의 한계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넘어가는 화살모양으로 배치”하는 “사건이다.”(204) 반란은 “저항이 구성된 권력의 구조에 가한-그리고 지속적으로 가하는-손상을 구성된 권력이 치유하는 것을 저지”(207)한다. 
3) 구성권력이란 무엇인가? “반란이 저항을 혁신적으로 되도록 밀어붙인다면” “구성권력은 이러한 표현에 형태를 부여”한다. “반란이 적의 삶형태를 파괴하는 무기라면, 구성권력은 삶의 새로운 구도와 삶의 집단적 기쁨을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힘”(204)으로서, “대안적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것”(207)이다. 네그리는 이 세 요소로 구성된 대항권력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항권력의 세 요소들-저항, 반락, 구성권력-이 모든 특이성으로부터 그리고 다중을 구성하는 신체들의 모든 운동으로부터 함께 용솟음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저항 행위, 반란의 집단적 몸짓,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구성의 공통적 발명이 셀 수 없는 미시정치적 회로를 통해서 함께 나아가며, 그리하여 새로운 힘, 대항권력, 제국에 맞서는 살아있는 것이 다중의 살에 새겨지는 것이다.(140) 

대항권력의 세 요소는 ‘미시정치적 회로’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다. 삶권력의 주체화를 거부하고 이에 맞서 주체성을 스스로 특이하게 생산하고자 할 때 저항은 이루어지고 삶정치적 공간은 열린다. 저항을 봉쇄하려는 권력에 대항해서 저항이 집단적으로 조직되고 권력의 심장을 향해 ‘화살모양’으로 배치되어 날아갈 때 반란이라는 ‘사건’이 벌어진다. 저항과 반란 속에서 ‘대안적 상상력’을 통해 “사회적 ‧ 정치적 구성의 공통적 발명”이 창조되면서 ‘구성된 권력’의 손아귀 밖에서 “삶의 집단적 기쁨”이 조직되기 시작될 때, ‘구성권력’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네그리는 이렇게 구성되는 대항권력의 활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비상동성’이라는 또 다른 논점을 제시한다. 푸꼬에게서 저항이 권력에 선행하듯이, 네그리에게서 대항권력을 구축하는 활력은 구성된 권력보다 선행한다.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려는 다중의 욕망이 자본과 주권의 권력보다 먼저이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권력에 맞서서 활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며, 선행하는 활력을 권력이 포획하고자 시도하자 대항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활력과 권력의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네그리는 말한다. 활력과 권력은 “다른 텔로스, 다른 형성원리, 삶을 다르게 구성하는 방식”(164)을 가진다. 그래서 네그리는 ‘맞섬’보다는 ‘다름’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름은 특이한 반면 맞섬은 주권 관계 안으로 혹은 자본 관계 안으로 우리를 다시 끌어들이면서 전도된 상동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164)이다. 네그리는 들뢰즈를 따라 다름의 특이성을 ‘이것임’(haecceity), ‘절대적 특이성’이라고 말한다. 그 특이성은 “척도를 가지지 않으며” 목적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텔로스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절대적 자유의 영역에 있으며, 텔로스는 초과의 산물, 활동의 산물”(164)이다. 네그리가 말하는 ‘특이성’이란 바로 이러한 ‘탈구조주의의 개념’으로, 그는 대항권력을 산출하는 다중의 특이성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전체의 산물이 아니면서 전체에 참여하는 주체 개념, 계급의 기능이 아니면서 계급에 참여하는 결정 개념, 추상적인 산물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그리하여 소외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활력의 표현인 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개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중을 ‘특이성들의 총체’라고 부를 때, 우리는 결코 총체 속에서 동일하게 되지 않으며 또 분리된 개체들로 실체화될 수도 없는 상이한 특이성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특이성은 총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동시에 총체를 만듭니다.(164-165) 

그러므로 대항권력은 “정해진 텔로스나 지양을 모”르며, “미리 이해된 본질의 발전을 창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며 또 삶을 창출하는 것”(209)이다. 대항권력은 삶의 활력 속에서 특이성을 산출하는 활동 속에서 구성된다. 구성된 권력의 포획에 저항하고, 반란하고, 새로이 삶을 집단적으로 자유롭게 조직하면서 다중의 삶은 “일반지성의 신체의 주체성”(228)으로 나아간다. 네그리는 바로 이러한 대항권력의 산출 과정이 스피노자의 ‘절대적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절대적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에 관한 이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자유의 새로운 형태의 발명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래할 민중의 산출에 특별하게 적합한 용어”(229)다. ‘절대적 민주주의’와 상응하는 대항권력을 구성하기 위한 다중의 ‘결정’은 혁명기 레닌이 포착했던 카이로스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네그리는 이러한 ‘결정’을 행하는 카이로스가 지금 매순간, 모든 곳이기도 한 여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니 네그리가 현실을 도외시한 낭만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 아닌지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네그리는 패배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결정’을 미루거나 ‘결정’을 할 시간을 기다리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대목은 네그리의 이러한 사유를 잘 보여준다. 이 대목을 옮기면서 이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우리는 다중의 결정이 실제적으로 되는데 200-300년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언제라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패배가 불가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떠나도록 합시다! 대안으로서의 엑서더스가 구성권력의 발본성에 상응하는데, 이 엑서더스는 그 자체로 구축적이며, 결정과 다중의 관계를, 그리하여 자유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관계를 긍정적 형태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또 다른 권력을 구축할 수 없더라도, 다중은 파업을, 도주를, 권력의 제거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성권력과 탈주 사이에서 진행되는 이러한 과정들은 서로 교직되고 교대됩니다. 이는 연이어 일어나는 파도와도 같은 다중의 결정들이며, 폭풍우 이는 바다에서 산출된 맹렬하고 강하고 견고한 파동들입니다. 권력에 의해서 대중이 둔감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반대로 다중의 존재론적 반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정치를 살고 있습니다.(249-250)


참세상

2011년 11월 11일

이성혁 문학평론가


원문 링크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category2=137&nid=6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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