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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노동뉴스 2017.11.10] 우리들의 흐르지 않는 시간들 / 안재성(소설가)


기사 원문 보기 : https://goo.gl/Phtrcy


오랫동안 아팠다. 37년 전 광주항쟁 직후에 혼자 잡혀서 무박 5일간 전두환의 개들에게 온몸이 새까만 피멍에 덮이도록 얻어맞은 후유증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평생의 신경통에 시달리다가 지난달에는 결국 전신에 근육염이 번져 응급 입원까지 해야 했다.

약 외에는 달리 치료방법이 없다고 해서 보름 만에 퇴원을 했는데 몸무게는 20킬로나 빠져 버렸고 다리 힘이 없어 자꾸 고꾸라지는 바람에 무릎이 다 까져 버렸다. 그날 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다가 김명환의 시집 원고를 받았다.

왜 그렇게 그의 시들이 좋았을까? 고개를 들 기력도 없고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는데도, 재미있는 옛날 단편소설을 읽듯, 한숨에 읽어 버렸다. 나만의 감정이겠지, 아니, 우리 세대만의 감정이겠지 생각하며, 그의 시어들이 몰고 오는 시원한 바람을 쐬어 봤다. 왜 그리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몰랐다.

소비에트연합, 사회주의혁명, 망실공비, 5·1창작단,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공산당선언, 볼셰비키…. 대다수 사람들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레닌 묘지 아래 깊숙이 파묻어 놓았던 단어들을 끄집어내어 슬픈 눈으로 어루만지는 김명환의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 5·1창작단을 하겠다며 그와 어울려 다니던 젊은 시절이 떠올라서였을까? 철도·열차·파업 같은 익숙한 단어들 때문이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10년이면 강물의 모래톱 등고선이 바뀌지만 사람은 여전히 10년 전 그 사람이다. 인간의 생체시간은 흘러가도 정신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흔히 사람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그와 친한 사람들은 그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음을 안다.

오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30년 전에도 이상한 행동을 했고, 김명환은 30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김명환이었다. 그래서 그는 슬퍼한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스스로를 바꾸며 살아왔다고 슬퍼한다.


슬펐다
변해 가는 내가 슬펐지만
변하지 않는 나도 슬펐다
- '첫사랑' 부분


유달리 결벽증에 가까운 순수함을 가진 그는, 젊은 시절 우리들을 이끌었던 혁명의 열정들이 맥없이 사라져 버린 데 대한 깊은 회한을, 제대로 활동해 보지도 못한 채 이탈했다는 미안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많던 지하, 전위들은 사라지고 너도나도 합법, 공개적인 진보정당을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에 어정쩡한 대응을 하면서 “변해 가는 내가 슬펐다”고 한다.

친구여, 벗이여, 시인이여! 슬퍼하지 말자. 휴대전화라 부르든 핸드폰이라 부르든 손전화라 부르든, 전화기가 할 일은 언제나 같지 않은가? 이름이 바뀌고 사용방법이 바뀐다 해서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전향이나 배신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대는 여전히 철도노동자 총파업 현장에서, 광화문 촛불 한가운데서, KTX 투쟁현장에서, 저항하다 산화해 간 노동자들의 영정 앞에서, 불화살 같은 시를 쏘아 대고 있지 않은가? 갈수록 더 두터워지는 자본주의의 철면피 얼굴에 작으나마 선연한 핏자국을 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무력하게 누워 있던 나를 일으켜 앉히고 웃음 짓게 만들지 않았나? 눈물짓게 만들지 않았나?

온 사방에 안개가 밀려오고 있다. 2천 년 전에 비해 오늘의 과학문명은 수치로 측정할 수 없이 발전했지만 인문학적 고민은 거의 변화가 없다. 2천 년 전 스파르타쿠스가 그랬듯이, 120년 전 전봉준이 그랬듯이, 오늘날 비정규 노동자와 알바노동자들이 그러하듯이 인간은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인류의 시계가 앞으로 가도록 밀지는 못했을 지라도, 뒤로 밀리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해 온 것만으로도 행운이 아닐까? 더욱 행복한 것은 그 길에 함께 선 친구이자 시인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날을 잡아, 사랑하는 나의 30년지기 김명환과 더 길고 긴 대화를 나누고 싶다. 무슨 역사론이니 혁명론 말고,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김명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조용하고 어눌한 웃음과 깊은 뜻이 담긴 썰렁한 농담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 나누고 싶다. 안개가 짙어지며 새벽이 길어지고 있지만, 해는 떠오를 것이다.





젊은 날의 시인에게 | 김명환 시집 | 갈무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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